모아산 - 연길의 명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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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아산 - 연길의 명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사노라면 0 218 218.♡.245.103
모아산은 연길의 명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맥고모처럼 생겼다고 모아산이라 명명되여 유서도 깊지만 옛날엔 벌거벗은 돌산이였는데 지금은 수림이 우거진 청산으로 변했다. 그동안 시민들의 노력과 관리 등 보살핌 속에서 수십년 세월의 년륜을 새기며 마침내 명실상부한 국가급삼림공원으로 만들어져 사시장철 등산객들로 인파를 이루고있다. 모아산은 그야말로 누구나 즐겨찾는 명절의 축제기분이 짙은 휴식의 명당터로 되였다.

모아산을 찾는 사람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가? 어떤 사람들은 모아산을 연길 력사의 견증자라고 말한다. 그런데 내가 찾는 또 하나의 리유가 있다. 매번 모아산 등산길에 오르면 ‘금몽탑’이라는 돌탑이 먼저 떠오른다. 때는 지난해 청명이 갓 지난 어느날이다. 철없이 내린 눈 때문에 산정에 오르는 널층계길은 몹시 미끄러웠다. 그리하여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남쪽 오솔길에 들어섰다. 눈 내린 뒤의 소나무숲 속의 길은 류달리 친근해보였다… 그렇게 오솔길을 따라 한참 걸어가던 나는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게 되였다. 아직도 추위에 떨고 있는 앙상한 잡목나무로 가려진 그 틈사이에 숨어있는 돌탑을 발견한 것이다. 모아산 여기저기에 이러루한 돌탑들이 질서없이 쌓여있기에 신기할건 없지만 탄탄하고 정성들여 쌓은 탑이라 생각되여 그저 지나칠 수 없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여느 돌탑과는 달리 ‘금몽탑(金梦塔)’이란 멋진 이름도 아로세겨져 있어 유표하게 이목을 끌었다. 어린 아이의 손바닥만한 잔돌로 쌓아올린 돌탑은 감동없인 볼 수 없는 존재로 느껴졌다. ‘금몽탑’이라는 큰 글씨 아래에는 또 페인트로 ‘축금몽(筑金梦),추몽(追梦),원몽(圆梦)’이라고 씌여있었는데 그 글은 더더욱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바람이 불어도 눈비 내려도 나는 멋지게 살리라’, ‘젊어선 푸른 꿈을’, ‘늙어선 노을꿈을’이라는 글귀도 나에겐 깊은 사색을 주었다. 돌탑에서 조금 떨어진 서쪽켠에 ‘원몽궁’이라 이름 지은 자그마한 휴식터가 있는데 아마도 여기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휴식하면서 이루고 싶은 꿈을 보듬어 보라는 의미인 것 같았다.

돌탑을 바라보면서 남달리 정성을 바쳐 돌탑을 쌓은 낯모를 지성인을 알고 싶은 충동을 나는 감출 수 없었다. 평범한 돌탑에 ‘금몽탑’이라 이름을 지은데는 남모를 사연이 깃들어 있을듯 싶었다. 이 ‘금몽탑’ 주인의 젊었을 때의 푸른 꿈은 무엇이며 늙어서의 노을꿈은 무엇일가?…

그날 이후부터 나의 등산코스는 남쪽 오솔길로 정해졌다. 혹시나 탑의 주인을 만날 수 있을가 하는 생각을 앞세우고 매일이다 싶이 다녔지만 그는 나타나주질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친구인 방신국과 함께 등산하며 한담하다가 ‘금몽탑’의 주인을 만나고 싶은 애타는 심정을 말했더니 그도 지난해에 등산하다 우연히 그 분을 알게 되였는데 이 몇달째 만나지 못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자기가 알고 있는 정도로 탑의 주인공에 대해 이야기하여 주었다.

‘금몽탑’을 쌓은 분의 이름은 김맹철, 어릴적부터 화룡에서 학교를 다녔다. 공부를 잘하여 길림대학 수학학부에 입학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계산수학전업을 졸업한 후 제7기계공업부에 배치받았다. 그는 맡겨진 과제들을 항상 출중히 완성하여 여러번 해당부문의 표창을 받았다. 특히 동방1호 위성발사가 성공되여 위성궤도 따라 발송되는 ‘동방홍’선률이 세계에 울려퍼질 때 그의 가슴 속에 흐르는 뜨거운 감격을 영원히 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조국의 동부변방 산간벽지의 가난한 조선족 가정에서 태여나서 자란 그에게 과학자로 성장하게 한 당과 나라의 은혜를 보답하기 위해 자기의 일생을 바치리라 다짐하였다. 그는 밤과 낮을 모르는 사람으로 되였다. 그저 자기의 모든 지혜와 생명은 위대한 조국을 위한 사업에 바치는 것이 최대의 행복이라고 간주하였다.

김맹철이 한창 꿈을 키울 때 10년 동란이 시작되였다. 전례없는 문화대혁명이 그에게 가져다 준 충격은 너무나 컸다. 그는 비록 한켠에 밀려나 방관자로 되였지만 환경이 천변만변 하더라도 항상 초심을 잃지 말고 사는 정직한 지식인이 되자고 다짐했다. 그는 상급 부문에 연변에 조동할 수 있도록 비준을 신청했으며 1년 후에 연길공업학교로 전근하게 되였다. 이후 그는 연길공업학교에서 고급공정사, 고급 교원으로 자신의 맡은 사업을 충실히 완성하여 수차 모범교원의 표창을 받았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나에게는 이 금몽탑의 주인공을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더욱 불 붙듯 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나와 방신국은 금몽탑에 나와있는 그를 만나게 되였다. 그는 초면인 나를 구면처럼 반갑게 대해주었다. 나는 첫눈에 그가 조용하고 소박하며 말을 아끼는 진중한 타입의 지식인임을 보아낼 수 있었다. 그렇게 인연이 되여 차차 무랍없는 사이가 되였다.
그는 연변에 온 후 줄곧 연길공업학교에서 사업하다가 정년퇴직하였는데 금년에 79세였다. 퇴직후 열정적인 등산객이 되였으며 고마운 고향산의 은정에 무언가 보답하고 싶었다고 한다. 하여 마구 널려져있는 돌로 탑을 쌓기로 마음 먹었다는 것이다.
돌탑을 쌓을 위치를 찾는데만 몇달이 걸렸다고 한다. 마음 같아선 금방 쌓을줄로 생각했는데 6년이란 시간을 공 들일 줄은 예산 밖이였다. 일손이 딸릴 때에는 부인까지 동원해서 돌탑을 쌓았다니 얼마나 많은 심혈을 쏟아부었는지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의 끈질긴 정신에 감동된 한 등산협회 회원들은 자금을 모아 1800여원의 거금을 주고 애솔나무 두그루를 사다가 나날이 높아지는 ‘금몽탑’ 아래의 안침진 곳에 심어주었다. 그리고 애솔나무의 이름을 자은송(慈恩松)이라 지었다 했다.
후에 이 희귀수종이 황산송임을 알게 되여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고 했다. 황산송이라 하면 인민대회당 영빈청의 ‘영객송’이 아닌가?!

금몽탑이 세워진 원몽궁의 바로 우쪽은 모아산 정상이다. 오늘날 바로 이 옛돈대자리에 지금은 삼각철탑이 푸르른 창공을 찌르고 섰다.

모든 사물은 나름대로 자기 존재의 리유를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김맹철이 정성 다해 쌓은 금몽탑이 존재하는 리유는 각별하다고 해야 하리라. 나는 그에게 젊었을 때의 꿈이 무엇이며 팔십고개에 오른 오늘의 꿈은 무엇인가고 구태여 묻고 싶지 않았다.

더 말해 무엇하랴, 모아산! 하면 그 자체가 모든 것을 말해 주는 것이 아닌가? 나는 모아산이 바로 하나의 커다란 금몽탑, 꿈을 품어주고 키워주는 명산이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의 선인들, 물론 우리 이 세대를 포함하여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런저런 원인으로 하여 미처 이루지 못한 꿈을 모아산에 고이 묻었던가?

하지만 나는 모아산은 언제나 해맑은 앞날을 바라보라고 축복해주는 희망의 산이라고 말하고 싶다. 수많은 세대를 이어오면서 우리 겨레의 성현들은 물론이고 오늘날의 지성인들도 그러하지 않았던가. 동시에 큰 뜻을 품은 후대들이 김맹철과 같은 전인들의 뒤를 이어 모아산 앞 세전이벌을 누비며 흘러가는 해란강의 뒤파도가 앞파도를 밀며 줄기차게 흐르듯이 장엄한 희망을 현실로 이루어 가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찬란한 앞날을 축복해주는 은혜로운 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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