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조선족의 집단이주

4. 조선족의 집단이주

너나잘해 0 261 58.♡.154.200
위만주국과조선총독부는 1936년 8월 ‘재만 조선인 지도강요’를 제정하였고 이듬해 9월에는 실천지도기관으로 조선과 만주에 선만척식공사와 만선척식공사를 세웠다. 구체적 내용은 새 천입호수는 매년 1만 호, 새 천입지역은 위 간도성 및 구 동변도의 23개 현에 국한된다, 국경지대의 조선농민은 지정된 곳에 이주해야 한다,

1937년부터는 기주 조선인에 대한 통제집결을 봉천성 개원현을 시작으로 6개 성, 16개 현으로 명시하였다. 1938년 7월, 이민사무처리위원회 심의를 거쳐《조선농민처리강요》 12항목이 결정되었다. 그 요점은 새로운 이주 희망자에게 조선총독부는 부동한 천입지에 따라 이주자를 결정하여 천입증명을 발급하는 것이다.

1941년 6월 28일에는《조선인개척흥농회 설립 및 협조에 관한 문건》및《조선인 개척흥농회 설립 및 협조지도강요문건》을 제정하였고 1942년부터 조선개척민의 입식계획이 제정되었다. 집단개척민은 2050호, 그중 북안성 1400호, 금주성 450호, 흑하성 200호이고 집합개척민은 450호, 그중 간도성 400호, 길림성 50호이며 분산개척민은 5000호로 예정되었다. 집단개척민은 만선개척 사무를 처리하는 해당인원을 가리키며 집합개척민은 금융조정을 이용하여 토지를 얻은 사람을 가리키며 분산개척민은 친지 관계가 있는 개척민을 가리킨다.

‘자작농창정계획’은 계획은 간도에서부터 시작됐다. 1933년부터 5년 동안에 조선총독부에서 매년 10만 엔, 동양척식주식회사에서 매년 30만 엔, 도합 200만 엔을 간도에 투자하여 2500세대의 조선인소작농을 ‘자작농’으로 ‘창정’하려는 것이다. 이 계획 하에 ‘동척’은 약탈한 토지 중 조선인농민 매 세대에 수전 5무, 한전 30무를 팔아 연 이식 8전 2리로 토지, 건축물, 밭갈이소 등 비용을 매 세대 당 800엔씩 대부하여 주고는 10년에서 15년 동안에 상환케 하였다. 1935년 12월에 이르러 118개 촌, 2800세대의 조선인농민들이 ‘자작농 창정’ 대상으로 되었으며 그 토지면적은 1만 3057정보에 달하였고 대부금은 144만 8780엔에 달하였다. 1936년 9월 ‘만선척식유한주식회사’가 설립된 후 ‘자작농창정 계획’은 동북의 38개현에서 실시되어 2322세대의 조선인농민이 ‘자작농창정’ 대상으로 되었다. 조선인농민은 사실상 일본식민회사의 토지에 얽매여 있었다. 봉건지주의 노예로부터 일본식민회사의 ‘빚진 노예’로 전락되었다.

1933년 3월 28일, 간도의 연길현 춘양향에 첫 번째의 집단부락 북하마탕(100호)이 건립되었다. 같은 해 4월에 태양촌(연길현 지인향, 69호), 중평(연길현 지인향, 58호), 춘흥촌 (연길현 지인향, 100호), 세린하(연길현 상의향, 91호), 장인강(연길현 수신, 150호), 청산리(화룡현 명신사, 89호), 토산자(화룡현 명신사, 100호), 낙타하자(훈춘현 용지향, 98호) 등 8개 집단부락이 건설되어 855명 조선인을 《수용》하였다.

1936년 4월과 12월, 관동군은 ‘남부방어지구 통제조선농민이민방침’과 ‘동부 국경지대에서의 조선농민통제방안’을 반포하여 동부 국경선일대에 산거한 조선인을 중쏘 변경으로부터 40Km 떨어진 곳에 이주하여 집단부락을 건설토록 명령했다. 이에 따라 1016호 4338명 조선인은 1937년부터 잉커우, 류허, 회덕, 왕야묘, 대감창 등 16개의 집단부락에 수용됐다.

1936년 9월 만선척식회사가 세워졌고 1938년에는 93만 7200원을 투입하여 1923개 집단부락을 건설했다. 1938년에 이르러 동북에는 1만 2565개의 집단부락이 있었다. 1939년 ‘치안숙정’중점이 동북의 동북부에서 동남부로 옮겨감에 따라 집단부락도 1만 3451개로 늘어났다.

이주의길은험난했다. 당시《길림일보》1937년 3월 21일자《고등촌 이민부락에 대한 조사》기사는 ‘조선 갑산, 무산군 부근에서 여기로 이주한 14가구, 97명 이민은 전염병이 돌던 1937년에 석달 사이에 73명이 죽어 24명밖에 남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

안도현장흥향은지금도조선민속촌으로유명하다. 정근재씨는 《그 많던 조선족은 어디로 갔을까?》에서 당시 이주상황을 적었다.

“합천군 쌍백면 화실리가 그의 고향, 이 노인은 1938년 합천 40호, 밀양 20호 등 경상도 농민 200여호가 함께 만주로 이주할 당시 부모를 따라온 이민 1.5세대이다. ‘아부지가 나무집 일도 하고 그랬는데, 만주에 들아가마 땅이 넓고, 집도 있고, 토지도 일가났다 캐서 왔지’.

(중약) 리씨 일행은 당시 대구에서 집결한 다음 원산, 간도의 도문, 안도를 거치는 렬차를 타고 만주로 이주했다. 그해 3월 28일, 안도현 명월진역에 내린 이주민들은 만선회사 마당에 집결했다. 3월이라지만 이곳의 기후는 한반도 남쪽과는 판이했다. 아직 사방에서 눈보라가 치는 백설의 산이였다. 추위에 떨며, 후회와 원망을 해봤지만 이미 뒤늦은 상황, 만척은 100세대는 복흥향으로, 나머지 100세대는 장흥향으로 이주지를 배정했다. 장흥향에 배정된 100세대는 다시 주가촌 40세대, 도안구 60세대로 나눠졌다. 현재 신촌에 사는 사람들은 당시 도안구에 배정된 사람들이다. 소달구지에 쪽박, 쪽지게, 절구, 호미 등의 짐을 실은 다음 허울뿐인 개척단은 산골길로 들어섰다. 명월진에서 도안구까지는 50리 길, 골짜기를 흐르는 개울가는 갈밭이고 주변 산은 울창한 원시림 천지였다. (중약) 도안구에 도착한 60호는 만척이 배정해주는 대로 남의 집 곁방살이를 시작했다. 당시 지금의 신촌 주변에는 이미 조선인들이 진출해 있었다. 오봉마을은 당시에도 한족과 조선족이 섞여 사는 마을이였고, 그 주변에도 다른 조선인 마을이 있었다. 뒤늦게 온 이들에게는 산골짜기의 땅이 주어졌다. 식량으로는 가구당 좁쌀 한 마대씩 배급됐다. 물론 가을에 갚아야 하는 빚이다. 조선에서 있을 때는 그래도 보리밥이라도 먹었는데 만주에 와서 좁쌀과 감자가 주식이라니 한심했다. 채소라고는 무 가리와 배추시래기뿐이었다.

도착한사흘째되는날부터집집의세대주들은사람들이살지않는도안구골짜기에서집짓기에동원되었다. 집이라야 지천에 널려 있는 나무를 베다 짓는 초옥이었다, 나머지 주민들은 괭이와 삽으로 생땅을 쪼아 받을 만들고, 곧장 감자와 옥수수, 콩을 심었다. 한반도 남쪽과는 기후가 달라 농사짓는 법도 달라야 했지만 하루아침에 새로운 농법을 익힐 수는 없는 일이었다. 먹는것도 모자라 좁쌀과 나물죽으로 연명하는 집이 허다했다. 만척은 두 집에 소 한 마리씩을 빌려줬지만 소를 부릴 줄 모르는 ‘남도치’(연변에서 남한 출신을 일컫는 말)들은 쪽지게로 모든 일을 해결했다. 50리 거리의 명월진에서 량식을 타 올 때도 지게로 져 날랐다. 겨울에는 만척의 빚을 갚기 위해 숯을 구웠다. 견디다 못해 도망가는 집도 생겨났다.“

안전농촌은집단부락의특수한형식이다. 안전농촌의 건설은 ‘자작농창정계획’을 밑거름으로 하고 있다. 동아권업회사는 1932년부터 남만과 북만에 ‘안전농촌’ 을 세웠다.

철령안전농촌은만철본선인란석산역서쪽 2600m 되는 곳에 위치했다. 조선총독부의 보조를 받았으며 동아권업주식회사가 대행하여 1932년에 건설되었다. 1941년 현재 383호가 있으며 경작면적은 960정으로 대부분 수전이며 대부금상환 연한은 10년이다.

영구안전농촌은봉천성영구현잉커우부근에있다. 1933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건설되었다. 1939년 현재 호수는 1834호, 수전개발면적은 4069정보이며 대부금상환연한은 15년이다. 요하의 하구와 전장대 사이의 소연자방아방에 1500정보를 개간하고 2500 정보를 상조했다. (1934년 6월말)

수화안전농촌은위빈강성수화현흥화향에위치해있다. 빈-북 간 진가강역에서 동쪽으로 4리 되는 곳이다. 1934년 동아권업회사는 우증점 일대 40명 지주의 토지 1602헥타르를 염가로 강제 수매하여 수화 안전농촌을 세웠다.

하동안전농촌은위빈강성주하현오길밀하역부근에위치, 1939년 동아권업주식회사에 의해 건설되었다. 2000여 정보를 자연 관개하였으며 9.18만주사변 후 1000호 수용 하였다. 1941년 현재 거주인구는 766호, 경작면적은 1878정이다.

삼원포안전농촌은봉-길 간 산성진동 남쪽 160리에 위치한 류하현 삼원포시가지의 접경지대이다. 1935년 예정된 제2차 안전농촌건설계획으로 건설되었다. 건설자는 동아권업주식회사이다. 1939년 현재 172호에 수전면적 355정을 소유하였다.

이외위금주성반산현영흥안전농촌, 빈강성 연수현 중리진 안전농촌, 삼강성 의란현 길성훈안전농장, 류가툰 안전농장이 있었다. 탕원현에도 금곡안전농촌, 학립강 안전농촌이 세워졌다.
※ 위 내용에 대한 오류와 사용자가 이를 신뢰하여 취한 조치에 대해 조선족정모는 모든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 SOSKR.COM
0 Comments
우리문학
게시물 검색
포토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