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동북 조선이민의 물결

2. 동북 조선이민의 물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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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 조선이민의 물결





    철도의 부설은 동북이주에 큰 편리를 주었다. 안-봉 철로는 러일전쟁 때 긴급히 부설한 경편철로인데 전후 일본은 표준궤도로 고치였다. 일본이 안-봉 간을 표준궤도로 바꾼것은 대러 방어의 절박한 수요에서였다. 러시아는 갑자기 시베리아 철도북선 계획과 흑룡강성 철도개선계획을 발표하였다. 세력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일본은 부득불 조선, 동북, 일본을 연결하는 가장 짧은 철도선을 연결해야 했다. 개건공사는 1909년 8월에 준공하였다. 1911년에는 또 압록강철교공사를 완성하였다. 배를 타고 내왕했거나 결빙기에 도강하여 월경하는 이주민은 철도의 편리를 타서 남만에서 다른 지방으로 쉽게 이주하게 되였다. 두만강지역에 있어서는 1923년 천-도天图 간 철로 개통, 1927년 국경철교의 준공으로 하여 도문철로의 연결을 완성하였고 사-조四洮, 조-앙洮昂 간 철로(사평—치치하얼)의 개통에 의해 조남 및 북만의 진출이 매우 편리하게 되였다.

    조선이주민의 이주경로를 간단히 정리하면;

    안동지방에서는 안동을 경유하는 안-봉선을 따라 서쪽으로 내려가 하류를 따라 웅악성熊岳城에 닿았거나 대양하 하류의 대고산 부근에 도달하였다.

  봉천지방에서는 안-봉선을 따라 봉천에서 무순 방향으로 훈하 유역에 분포되였다.

  흥경지방은 무순을 거쳐 흥경에 입주하였고 강을 건너 통화에 이르렀다. 휘하 상류로 되는 거유하巨流河 연안지방에는 중국인은 거의 없고, 전부 조선이주민이 수전 농사에 종사하였다.

  동산지방은 남-만선을 따라 이주하여 개원, 철령 지방의 각 하류 연안을 따라 거주하였는데 이 일대는 남만의 보물고였다.

  길림지방은 남-만선을 따라 장춘에서 다시 길-장선으로 길림에 도착하고 다시 사면으로 퍼져 통화, 해룡 등 북쪽으로 널려졌다.

  동몽지방은 사-조선을 따라 몽골에 입주하였으며 바이인타이라이白音太來 남부에서 조선이주민을 모집하여 수전 농사를 지었다.   

  재만 조선인의 인구 수량에 대해 여러 가지 설법이 있다. 1926년도 조사에 의거하면 일본영사관 자료는 54만 명, 동양협회 자료는 73만 명, 만철의 자료는 78만 명, 이밖에 1927년 대동민보사大东民报社의 조사자료는 137만 명으로 나타났다. 1930년 1월호《신천지》에  船乔씨는 “미조사 된 약 60만을 고려하면 재만 조선인은 1930년경 약 150만 명일 것이다.”로 주장했다.

    동북에 이주한 조선인 대부분은 살길을 찾아 떠난 방랑의 무리였다. 당시의 참상을 봉천에 있는 기독교전문학교의 외국인목사 큑은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만주에 오는 조선이민의 고통은 심지어 그들의 불행을  실제로 본 사람조차 완정하게 묘사할 수가 없다. 겨울날 영하 40도의 혹한 속에서 백의를 입은  말없는 군중은 혹 10명 혹 20명 혹 50명씩 떼를 지어 넘어온다....몇 명의 조선인이 맨발로 강변의 깨여진 ※※장우에서 바지가랭이를 걷어 올리고 두자나 깊은 ※※장이 섞인 강물을 건너가서 저편 언덕에서 바지가랭이를 내리고 신을 신는 것을 나는 본적이 있다. 남루한 의복을 입은 여자들이 신체의 대부분을 들어내 놓은 채 어린애를 등에 업고 간다. 이는 피차간에 조금이라도 체온을 돕고저 함이다. 그러나 어린아이의 다리는 남루한 옷 밖으로 나왔기 때문에 점점 얼어붙어 나중에는 조고만 발가락이 맞붙어버린다. 남녀 늙은이는 굽은 등과 주름살 많은 얼굴로 끝날 줄 모르는 먼 길을 걸어 나중에는 기진맥진하여 발을 옮기지 못하게 된다. 그들이 노소강약을 막론하고 그 고향을 떠나오는 것은 모두 이 모양이다.’ 



  매일신보는 1929년 12월 2일자로 청량리 정거장의 첫 기록으로 하루 밤 사이에 백 여 명이 간도로 향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풍년을 등지고 남무녀대로 남북동북으로 흘러가는 남녀가 원산의 배편으로 떠나는 사람이 매일 백 여 명에 달한다함은 이미 보도한바어니와 그 사이 경청 ?? 떠나가는 사람의 수효는 매일 십 여 명씩에 지나지 못하는 터이더니 삼십일 밤에 청량리 정거장을 떠난 남녀의 수효가 일백육십팔 명으로 금년에는 처음 보는바 그들은 충청남도를 비롯하여 황해도, 경기도, 강원도 등지에 사는 농민의 일단이여섰더러라‘



    같은 신문은 ‘만주로 동북으로 물밀듯 몰려가는 사람들’이란 기사에서 ‘날마다 기차는 만원 이상의 만원이고 당국에서도 두통 중’이라고 주장하였다.



    ‘만주의 신국가가 성명된 이때 동북의 낙토를 꿈꾸고 만주로, 만주로 떠나가는 사람이 만아지게 되였다. 11월 밤에도 경성역을 떠나 만주로 간 사람이 90여 명이나 있었고 부산방면에서 온 이가 또 90 여 명이어서 경성역에서는 객차 한 대를 증결하여 가지고 출발하였다. 이와 같이 만주 가는 손님 가운데 연한 생각으로 가는 사람이 태반이어서 총독부에서는 11일 관동청으로부터 막연한 만주행의 취체를 하여 달라는 요구까지 왔었는데 매일 신의주를 통과하는 만주손님은 4-5백 명을 돌파하는 현상이다.‘



    간도에서 가장 대표적인 조선인거주지는 룡정 시가지와 국자가이다. 1933년 김성호 씨는 매일신보에 룡정촌에 다녀 온 기행을 9월 29일자로 발표하였다. 당시 동포 근거지의 모습을 다소 감지할 수 있는 대목이다.



    ‘마차에 앉아서 국자가의 시가를 한 바퀴 돈 뒤에 우리 일행은 룡정으로 떠나고자 노정을 급히 서둘렀다. 점심도 변변히 먹지 못하고 기차시간을 타서노라, 정거장으로 달려갔다. 룡정에 도착되기 전에 기차는 조양천에서 갈아타야만하고 룡정행 차를 타려면 조양천에서 세 시간을 기다리지 않으면 아니 되게 되였다. 부득이 한 일이라 정거장에서 시간을 기다리기로 하였다. 룡정 역에 차가 닿기는 오후 7시 경이다. 해는 넘어가서 어둑어둑한데 전기도 켜지 않은 정거장 표면은 몹시도 어두운데 그 위에 비조차 퍼부어서 초행인 우리는 방향을 정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다가 마차를 잡아타고 여관으로 들어갔다.

    룡정은 자래로 간도조선인 생활의 중심지요 또는 사건 발생지로 유명한 땅인 만큼 거기 조선인 시가요 조금도 동북국에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 없다. 간도에서는 가장 큰 도시이다. 시가 서북에는 평련산, 마안산, 모아산이 있고 시가중앙에는 상구공원이 있는데 인구 2만 1000명인 가운데 동포가 1만 6000여가 있다. 총영사관이 있고 간도중학을 비롯하여 영신학교, 대성학교, 기타 예수교 경영의 남녀학교가 많이 있어 오랫동안 근거를 두고 우리 동포들이 사려오는 땅이라 교육기관도 상당하게 있는 셈이다. (중약) 교육방면에 주력을 하게 되었고 따라서 이리저리 이동하던 유량의 생활도 다시 안돈하게 되었으나 최근에는 국자가의 시가지확장발전과 이에 반하는 생활의 축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되어 조선 사람이라면 룡정을 중심으로 생각하던 것이 근일에 많이 이동케 되였다 한다. 또 한편은 철도전용과 상삼봉으로 가는 광리철도의 부설 등으로 회막동(현 도문시)으로 이주하는 이가 상당히 많다고 한다.

    간도를 본다면 룡정을 빼놓고는 실지의 조선 사람의 집단 된 생활을 보았다고 하지 못하리만치 룡정은 동포가 많아 상계의 패권도 손에 쥐고 농업의 주장도 손에 쥐고 기타 제반 것에 조금도 조선내지와 다름없이 생활을 해나가는 것을 보면 간도라는 명칭을 부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지경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책보 끼고 학교 가는 어린학생들이 몹시도 눈에 귀엽게 보인다. 너른 마당에서 뛰노는 것도 무한 천진해 보인다. 부형을 따라 이곳에 와 사는 그애들에게는 이곳이 룡정이거나 함경도거나를 가릴 필요도 없다. 하루 밤을 지내고 일행은 이번 여행의 노정을 끝마치고 조선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였다. 영사관을 비롯하여 자동차로 시가를 일주한 후에 정거장으로 나왔다. 느리고 지지분한 차를 다시 타게 되였다. 이 길을 바로 달려가면 조선 땅 상삼봉上三峰에 닿는 것이다.‘
※ 위 내용에 대한 오류와 사용자가 이를 신뢰하여 취한 조치에 대해 조선족정모는 모든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 SOSK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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