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조선족의 월강과 동북 개척

1. 조선족의 월강과 동북 개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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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이라 함은 혹한이 연상되고 조선민족이라 하며는 장백산과 직결되는 것이 상식적이다.

장백산맥은 동북의 중요한 산맥으로서 그 중심부는 장백산이다. 장백산천지는 두만강, 압록강, 송화강의 발원지이다.

    장백산은 신비로운 산이다. 『청태조실록』에는 장백산을 ‘선세가 발상한 발원지’라고 기재하였고 강희 황제는 1677년 송화 강변을 순시할 때 장백산을 향해 제사를 지내고 장백산신長白山神으로 높이 존대하였다. 조선민족은 장백산을 영지로 간주하고 크게 숭배하였으며 『대한강역고대한강역고』에는 장백산은 한나라 산의 조종이라고 하였다.

  중국 동북지역은 예로부터 여러 정복자의 꿈이 서려있다. 청나라 이전 만주라 부르는 동북지역은 국토개념 보다는 부속지의 색채가 짙으며 행정적 요소는 거의 찾아 볼 수 없었다. 청나라 이후 이 지역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져 중국에서는 봉천에 성경장군을 최고관리로 두었고 1907년에 이르러서는 중국내지와 같은 성(省)제를 선택하여 봉천성, 길림성, 흑룡강성 3개성으로 나누었다. 

  일본인의 만주진출은 군인에 의해 실현되었다. 1592년 7월 임진왜란 때 加藤淸正이 왜군을 거느리고 두만강을 건너 간도 국자가 부근까지 침입한 것이 첫 걸음이다. 1904년 일로전쟁에서 일본은 러시아를 누르고 결과 남만주철로와  부속지대 및 관동주의 조계지를 넘겨받았으며 1906년에는 2억 원 자금으로 남만주철로주식회사를 설립, 관동도독부를 설치하여 만주는 진정으로 일본이민의 활동무대가 되었다. 1909년 9월 4일, 일본은 청나라와 ‘두만강 중한변무협정’(간도협약)을 체결하고 같은 해 11월 용정총영사관을 설치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동양척식회사는 각지에 분사를 앉히었다.

  1914년 만철독립수비대의 퇴역군인들로 조직된 일본 재향군인이민단이 처음으로 만철연선 남만에 정착하였고 잇달아 여러 명목의 이민단들이 처음으로 만철연선에 육속 들어왔다. 하지만 기후가 차고 언어장애, 생활습관 차이 등 허다한 원인과 한족의 견결한 반대로 만주에 오래 거주하지 못하였다. 이것이 일본인의 첫 만주이주 실패이다.

  조선은 중국 춘수전국시대에 요동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926년 발해를 멸하고 만주 일대를 휩쓴 거란족의 북진정책으로 고려는 요나라와의 전쟁을 피면할 수 없었으며 993년, 1010년, 1018년에 거친 3차례의 거란침입전쟁에서 많은 조선인포로가 생기였음은 추측할 수 있는 일이다.

  중국 명나라 때는 조선인이 중국 요동일대에 자유로이 천입하는 고봉시기이다. 명나라는 동북지역개발을 위하여 조선인의 천입에 대해 보호조치를 강구하였고 그들의 정착을 허용하였다. 명나라 시기 중국에 유입한 조선인 중 뚜렷한 세력을 형성한 예도 있다. 철령 이씨(시조 이영)는 중국에서의 500년 긴 세월을 거쳐 지금에 와서는 수만 명의 후손이 중국의 료녕, 산동, 북경, 길림 등 성(시)과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에 널려있다.

  중국에 천입한 조선인의 후예들은 자체의 집거구역을 형성하였으며 오랜 세월 중국문화의 영향 하에 동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 대표적 사례로는 요녕성 개(盖)현 진툰향의 박씨촌,  본계현 산성자(山城子)향 박씨촌,  하북성 청용(靑龍)현 박씨촌, 평천(平泉)현, 승덕(承德)현 박씨촌 등이다. 

    1861년 떼목군으로 월강한 조선인들은 혼강 유역에 정착하여 농사를 짓게 되여 부락을 따라 이주하는 현상이 생기였다. 한편 1875년에 조선개간민은 통화현 상전자, 하전자 등지에서 벼농사에 성공하게 되었다.

  청나라는 1875년 봉천성 봉금령을 폐지, 1877년에는 무민국을 설치하였고 1883년 3월, 청나라는 조선과 “봉천과 변민 교역장정”을 맺었다. 

    1905년 이후, 압록강 통화지방에 한국 유신참판 이시영을 비롯하여 조선남부 농민이 많이 이주하였다.

  간도에서 정식으로 되는 개간은 1878년에 시작되었다. 길림장군 명안(铭安)은 사람을 파견하여 사사로이 개간한 간도 돈화 일대의 토지를 측량한 다음 농민의 요구에 따라 땅문서를 내주고 땅세를 받기 시작하였다. 1882년 두만강북안일대의 조선간민들을 중국호적으로 등록하여 돈화와 훈춘 두 곳에서 각기 관할하게 하였다.

  조선간민은 처음엔 주로 화룡욕 관할 내에 있었다. 일부 한족들은 부분적 황무지를 조선간민에게 팔았다. 조선간민은 토지소유권을 얻게 되었다. 이들은 해란강과 부르하통하, 가야하를 넘어 그 이북과 이서 지방에도 수많은 촌락을 건립하였다.

    1904년, 일로전쟁 끝에 러시아가 밀려나 간도는 일본통치권에 들어갔다. 이 시기 많은 조선개간민이 조선북부에서 간도로 천입했다. 1904년, 간도 조선개간민은 5만여 명,  1909년에는 18만 4837명으로 폭증하였다. (《연변지구역사당안사료집(1)》) 조선간민 거주지역도 1894년 이후 두만강북쪽기슭에 국한되었던 것이 1910년경에는 연길청 서부, 장백산 동쪽  외육도구 등 지대로부터 동으로는 훈춘하 유역, 북으로는 동불사, 하마탕, 수분전자 등지에 이르기까지의 연길청 4000평방 리의 지역 전부에 퍼졌다.

  조선개간민이 두만강이북에 이주한 시간은 압록강서쪽지역 보다 퍽 늦으나 북간도 간민에 대한 특수한 추진정책과 특별개간구의 설치로 하여 매우 빠른 속도로 또 하나의 새로운 조선간민 집거구 중심을 형성하였다.

  1900년 러시아는 동청철도를 수축하기 위하여 시베리아와 조선으로부터 대량의 조선 고용인을 모집하였다. 이 철로는 하얼빈을 중심으로 하여 동쪽은 수분하, 서쪽은 만주리, 남쪽은 대련까지 이르렀다. 철로가 수건 된 후 부분적 조선인은 할빈, 일면파. 횡도하자, 목릉 등 동청철도 동선의 목단강, 목릉하 유역에 남았다. 우수리강서부연안의 부원, 요하, 호림, 보창, 밀산 등지의 조선이주민은 처음엔 시베리아에서 넘어왔고 후엔 간도,통화와 조선에서 천입하였다. 할빈 조선인은 1892년에 처음 들어왔으며 중동철로 수건 후 남은 이들은 농사를 짓거나 식당, 여관을 경영하였다. 치치하얼의 조선개간민은 조선북부에서 시베리아를 거쳐 천입되었고 만주리의 조선인은 19세기말 녕고탑에서 눈강을 거쳐 하이라얼에 이주하였다가 동청철로가 준공되자 정착을 택하였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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