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편 육탄혈전만이

제8편 육탄혈전만이

너나잘해 0 321 119.♡.34.61

제8편 육탄혈전만이



무오독립선언서


                          1

   조용한 청파호의고경각.

   서일은 갓완성한《회삼경》 정식출판에 앞서서 등사판으로 먼저 몇책 묶어냈다. 그 저작에 대한 타인의 반응을 한번 타진해보자는 생각에서였다.  이럴 때 김헌 도사교가 서일을 찾아왔다. 그는 탁상우에 놓여있는 회삼경등사본을 보고서칭찬을아끼지않는다.

   《백포동생, 이를 어찌 일반인이 쓴 글이라 하리오! 인(仁), 지(智), 용(勇)을 분삼합일(分三合一)의 종리(倧理)로 귀일케함으로써 리해를 명철케 하니 실로 유일의 묘화대법(妙化大法)이오다!》

   《과찬이오다. 이 동생은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서일이 집필한 회삼경에 대한 무원종사(茂園宗師)의 평은 긍정적이였다. 그는 이런 리론으로는 군사를 지휘하는데도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겠다면서 그야말로 값진 경전이라 찬양했다.

   이틑날 왕청에서 계화가 오고 요즘 가장집물을 거둬갖고 룡정을 떠나 지금 그곳 덕원리에 안착한 박찬익이도 오다보니 여럿이 모여앉게 되였는데말들이 오가는 중 자연히 국외의 교포상황을 운운하게 되였다.

   로씨야에는 지금 주로 이르크츠크, 추풍, 쌍성, 사만리 그리고 울라지보스또크의 신한촌에 교포들이 많이 모여살고있다. 거기서  무장의 서막이 오른 것은 전에한일합방이 되자 류린석, 리상설, 리범윤 등이 의병운동을 벌려서부터였는데 정재관(鄭在寬), 리강(李剛) 등은 치타에서 《국민회》를 조직하여 미국에 있는 교포와 련락을 취하면서 각처에 지회를 두고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1912년 3월 그곳 교포사회의 유력자인 리종덕(李鍾德)은로씨야관헌의 허가를 얻어 《권업회(勸業會)》를 조직하고는 그 본부를 신한촌에다 두고 교포의 산업을 장려하거니와 신문을 발간하여 계몽까지 담당하고있었다.

   한편 씨베리아의 교포들은 이해의 8월에 레닌, 케렌스키 등에 의하여 제2차 로씨야혁명이 일어나 백계(白系)니 적계(赤系)니 하여 크게 두파로 갈라져 혈투를 하게 되자 요즘(12월)에는 쌍성에다 《전로한족회(全露韓族會)》 중앙총회를 설치하였다. 회장 문창범(文昌範)을 비롯하여 간부인 김립(金立)과 윤해(尹海) 등은 그곳의 교포들에게 자치사상을 고취하면서 간도지방의 교포들과도 련락하여 볼쉐비크와 손잡고 항일투쟁을 시작하려하고있었다.

   여기 만주는 어떠한가? 동만주의 화룡, 왕청, 연길, 훈춘 등 지방과 남만주의 장백산, 무송, 림강, 집안, 통화, 환인, 류하, 청원, 관전, 안동 등에 거류하는 교포는 4, 50만호에 인구가 거의 200만을 넘고있는데 선지선각자인 독립운동가들은 사처에서 독립단을 조직하여 사업과 교육 그리고 군사면에 실력을 키우려고 애를 쓰고있었다.

   독립운동은 국내의 의병운동에이어 온양되고있다. 전에 류린석이 이끌고 왔던 부대는 안동성의 집안, 통화 등지에서 진용을 정비하고있으며 리진용, 조맹선, 윤세복, 홍범도, 차도선 등은 《포수단(砲手團)》을 조직했다. 전덕원이 이끌고 온 부대는 관전, 환인 등지에 정착하고는 백삼규 등과 손잡고 《농무계(農務契)》, 《향약계(鄕約契)》를 조직했다. 하지만 이상의 단체들은 규모에 있어서나 영향력에 있어서 독립단체로 보기에는 너무나미약한 것이였다.  

  그에 비해보면 하나의 종교단체로 표방하고 나선 대종교는 사실상 하나의 어마어마한 반일조직임이 분명했다. 여지껏 포교가 잘되였기에 신도들은한사람같이 굳게 뭉치였고 각오도 높아서 민족정신과 투쟁정신이 철저함에는 그 어느 조직도 비기고 따를 수 없는 것이다. 서일은 토대를 이만큼 닦아놓았으니 중광단만도 이제 대한독립선언을 만방에 떳떳히 발표할 때가 되였다고 보면서 김헌과 단둘이 있는데서 자기의 속심을 털어놓았다.

   《중광단에서 대한독립선언서를 작성하여 만방에 공포합시다.》

   《가만있자, 인자 방금 뭐라했소? 우리가 대한독립선언서를?...》

   김헌은 저으기 흥분했다. 그도 품어 온 생각이였는데서일은 도사교께서 직접 그 선언문을 쓰시는 것이 어떤가며문의한다. 의기투합한 그들간이라김교헌은 묵묵히 생각하고나서 하다면 빈약한 필력이오만 한번 재간을 부려보리다 대답했다. 서일의 건의를 기꺼히 받아준거다.

김헌은당장 그날 밤으로《대한독립선언서》의 초고를 써서 이틑날 아침에 들고와 서일앞에 내놓았다. 서일은 그것을 받자 저으기 흥분된 목청으로 내리읽었다.


  우리 大韓同族남매와 온 世界友邦동포여, 우리 大韓은 완전한 自主獨立과 우리들의 평등복리를 우리 자손 黎民에게 대대로 전하게 위하여 여기 異民族專制의 학대와 압박을 벗어나서 대한 민주의 자립을 선포하노라.


   대한독립선언서 초안의 첫머리글이 이러했다. 첫구절부터 서일의 맘에 들었다. 서일은 김헌(김교헌)을 향해 이제 어느날 대종교도 신분의 독립운동가들을 불러 한자리에 모여놓고 토론하여 보충도 하고 수개도 해야 할 것같다고했다.


2


   이러던차 뜻밖에 김동삼이 총본사를 찾아왔다. 그는혼자가아니고 초면인 조소앙(趙素昻)과동행하였다. 김동삼은 자기보다 9살 아래인 친구를 서일에게 인사시켰다.

   서일은 그와 상면하게 되었음을 무척 기뻐하면서 친절스레 대해주었다.  

   《선성을 많이 들었습니다만 인제야 찾아뵙게 됩을 용서하시요. 선생님은 신사년이구 난 정해년생이니 여섯 살 차이. 동생으로 여겨주십시오.》

   나이 30세인 조소앙은 선생님은신사년이구난정해년생이니까여섯살차이다, 동생으로 여겨 달라고 하면서 출생지가 경기도 양주라면서 자신을 소개했다.

   본명은 용은(鏞殷)이라 것, 한문(漢文)은 소시적에 할아버지한테서 배워 익혔다는 것, 18세 때 관비유학생으로 도꾜에 건너가 중학교에 다니고 22세때에 메이지법학부에 입학했다는 것, 신민회(新民會) 105명 사건에 련루자로 일본헌병대에 잡혀갔다가 증거가 없어서 석방되였다는 것, 26세에 메이지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귀국하여서는 대동법률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이듬해에 상해로 망명하였다는 것, 그곳에 있는 신규식의 창의로 조중두나라 민간의 우의를 증진시키기 위하여 호한민(胡漢民), 대계도(戴季陶), 료중개(寥仲凱), 진과부(陳科夫) 등 중국 국민혁명의 여러 원로들을 방문했다는 것, 이듬해에는 혈족의 심리개혁과 단결을 위하여 국내로 잠입하려했으나 도로 피검되였다가 겨우 풀려났다는 것 등등.

   서일은 투사다운 조소앙이 맘에 들어 손을 다정스레 꼭 잡았다. 이어 대종교와 중광단의 현실을 자상히 소개하면서 우선 덕원리 명동학교 학생중 오백명으로 따로 기병대를 조직하고 지금은 마상검술훈련을 하고있다, 훈련장은 리홍래라고 동을 달았다. 제눈으로 직접 보자는 조소앙의 청으로 서일은 그들을 데리고 왕청으로 갔다. 500필의 말잔등에 오른, 칼로 무장한 끌끌한 젊은이들의 위용을 보는 순간 조소앙과김동삼의입에서는 감탄이 련신 튀여나왔다.

《과연 빈말이 아니였군!》

   이때라고 서일은 요즘 자기와 김헌사이에 중광단만이라도 만방에 독립선언을 하자고 의논이 있어서 지금 당장 행동에 들어가려하고 있음을 토로했다. 그랬더니 김동삼도 조소앙도 낯빛이 확 밝아지면서 과연 그런가 그래 그리고는 어쩔셈이냐했다. 서일은 이것은 각별히 중대한 문제이니만큼 몇사람을 찾아 구체적으로 연구하자했는데 마침 잘오셨다고했다.  

  《그렇게 하시오. 반드시 그래야합니다.》

   조소앙은 중광단에서 독립선언을 내는 것을 적극 지지했다. 김동삼은 서일이 아직 생각이 미치지 못한 점을 집어내며 선언서를 중광단이 내는 것으로 하되 간벽을 두지 말고 독립운동을 이끄는 수령급유지들의 서명은 받을수 있는데까지 다 받는게 좋겠다고건의하였다.

   훌륭한 발의(發意)였다.


3


   서일은 김동삼과 조소앙을 데리고 화룡에 갔다. 거기 총본사에서 도사교 김헌과 함께 이 문제를 좀더 연구하자는것이였다. 될수만있다면 이 기회에 만주와 로씨야, 조선, 미주에 흩어져 있는 독립운동가들이 한자리에 많이 모여봤으면 좋으련만 그렇게 하기는 힘들것이니 유감스러웠다. 그들은모두가 공인하는, 친숙하고도 활약적인 독립운동가들부터 하나하나 짚어보았다.

   함북출신으로서 외교활동능력이 좋은 덕신사(德新社) 사장 서상용, 밀양출신으로서 국치후에 남만 환인현에 이주하여 정착한 손일민, 남만 교포들의 자치기관인 부민단(扶民團) 단장 허혁(許赫), 상해에서 3년전 《대동보국(大同輔國團)》을 조직한신규식과박은식, 미국에서 교포조직과독립운동을맡아활발히 해나가고있는 안창호, 리이승만, 박용만, 정재관 등등이 모두 화제대상들이였다. 그중 미주에서 실제로 군사훈련에 공을 많이 세운 박용만이 요즘 관련일로 태평양을 건너서 중국에 왔다고한다. 그 목적은 이쪽의 독립운동진영과 밀접한 유대를 건립하기 위함이란다.

   마침잘되였다. 그의 서명을 받으면 미주쪽에서도 참가하는 것으로 된다. 로씨야쪽 리동휘와 문창범, 안정근 등은 김동삼이 직접 통지하겠다고 나섰다. 연해주에서 활동하는 리범윤은  몇해전에 만주로 건너와 지금 연길현 명월구에 자리잡았고 로씨야로 무기를 구입하러 갔던 리동휘는 태평구무관학교가 강제로 페교되자 돌아오지 않은채 그곳에 남아 지금은 케렌스키의 사회당과 유기적련락을 가지면서 새형식으로 독립운동을 모색하고있다고한다.  

   서일과 김헌, 조소앙과 김동삼 넷은 김헌이 이미 써놓은 대한독립선언서의 초고를 내놓고재검토를 했다. 결과 이미 작성된 초고를 바탕으로 내용을 더 가첨하는게 좋겠다고 여겨져 이를 조소앙이 책임지고 완성키로 했다. 서일은 우리가 조국의 광복을 맞이하기 위해 찾아낸 가장 적절하고 현실적인 방법이 바로 무장들고 싸우는 것이라며선언문에 《육탄혈전을 함으로써 독립을 완수하자.》고 명철하게 밝히자고하였다. 조소앙이 서일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감하면서 태도가 선명하고 견정한 사람만을 골라 서명을 받자고 했다.

   그들은 토론끝에 개개인에게서 서명받는 일은 김동삼이 책임지기로 하고 집합장소는 대종교총본사가 있는 화룡 삼도구로, 시간은 1918년 11월로결정했다. 날자가 다가오자 독립운동에 이름날리는 수령급 인물들이 하나 둘 화룡 삼도구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하여 대종교총본사는 갑작스스러운명절기분에 잠기게 되였다.


4


   로씨야에서 몇이 왔고 미국에서 온 박용만이도 서명에 참가해서 고마웠다. 그가 이 일을 미국에 있는 안창호와 정재관에게 전보를 쳐 알렸더니 그들은 기뻐하면서 대단한 일을 한다며  뜨거이 축하했거니와 부득불한 환경에 오지 못하게되니 박용만에게 대리로 서명해줄것을 위탁했다. 그러나  리승만은 이번 거사가 대종교에서 중광단의 명의로 내외 각지에 널려있는 인사들이 한자리에 모여 하는것이라 했더니 그런가 할뿐 다른 말이 더 없더라는 것이다.

    어찌하든 흥분과 격동의 어울림속에 《대한독립선언서》가정식발표되였다.


  ...슬프도다. 일본 쪽바리들이 임진이래 반도에의 죄악은 만세에 감추지 못하며 갑오 이후 대륙에서의 작죄는 만국에 허용치 못할바이다. 너희 싸움을 좋아하는 악습은 가로되 자신을 보존하고 자신을 방위한다는 구실로 끝내 하늘에 반하고 사람에 거역하는 보호합병을 날조하였다...10년무단의 작란이 이에 크게 자람으로써 하늘은 너의 두독을제압하여 우리에게 호기를 내리시니 하늘에 따르고 인간에 응하여 대한독립을 선포하며 너희 합방의 죄악을 선포 징계한다.

   (1) 일본의 합방동기는 너희들의 온 일본주의를 아주에 펼치는 것으로 이는 동양의 적이다.

   (2) 일본의 합방수단은 사기, 강박, 불법, 무도의 무력, 폭행인 것으로 이는 국제법의 악마이다.

   (3) 일본의 합병결과는 군경의 야만스러운 권세와 경제의 압박으로서 종족을 말살하고 종교를 강박하고 교육을 제한하여 세계문화를 저애하는것으로서 이는 인류의 적이다....

   우리 마음이 같고 도덕이 같은 2천만 형제자매여, 檀君皇祖께서는 上帝左右에서 명을 내리시어 우리에게 기운을 주셨다. 세계와 시대와는 우리에게 복리를 주고자한다. 정의는 無敵의 칼이므로 이로써 하늘에 거스르는 악마와 나라를 도적질하는 적을 한손으로 무찌르라. 이로써 4천년 祖宗의 榮輝를 빛내고 이로써 2천만 赤子의 운명을 개척할것이다!

   궐기하라! 독립군! 독립은 일제히 천지를 바르게 한다.

   한번 죽음은 사람의 면할 수 없는 바이니 개, 되지와 같은 일생을 누가 원하는바이랴. 殺身成仁하면 2천만동포는 같이 부활할 것이다.

   일신을 어찌 아낄 것이냐. 힘을 기울려 나라를 회복하면 삼천리 옥토는 自家所有이다. 일가의 희생을 어찌 아깝다고만 하겠느냐.

   아아! 우리 마음이 같고 도덕이 같은 2천만 형제자매여! 국민된 본령을 자각한 독립인 것을 명심할것이요, 동양의 평화를 보장하고 인류의 평등을 실시하기 위해서의 자립인 것을 명심하도록 황천의 明命을 받들고 일체의  邪惡으로부터 해탈하는 건국인 것을 확신하여 육탄혈전함으로써 독립을 완성할 것이다!


                                                  단군기원 4252년 11월.

                                     

        金敎獻, 徐  一, 金東三, 申采浩, 趙鏞殷, 金躍淵, 朴瓚翊,

        李範允, 呂  準, 柳東說, 李相龍, 金佐鎭, 金學萬, 朴殷植,

        李  光, 申  聖, 鄭信源, 李東寧, 申八均, 李東輝, 文昌範,

        李世榮, 鄭  信, 李  沰, 朴性泰, 鄭安立, 任  方, 尹世復,

        曹成煥, 朴容萬, 崔炳學, 韓  興, 孫一民, 安定根, 朴政翊,

        羅  愚, 許  赫, 黃尙奎, 金東平.>》      

       

       서명자  39명.

 

 대한독립선언서는 만주와 로령, 미주의 유지일동의 명의로 발표되였다. 김교헌, 서일, 김동삼, 신채호, 조소앙, 조성환, 신규식, 김약연, 리범윤, 려준, 리상룡, 김좌진, 박은식, 리동녕, 신팔균, 리동휘, 문창범, 리세영, 윤세복, 박용우 등 쟁쟁한 항일운동가 39명의 서명으로 된 이 독립선언서가 바로 일본 도쿄 류학생들이 발표한 2.8독립선언서보다도 썩 이른 무오독립선언서이고, 발표일이 이해 1918년 11월 13일이다.

이같이무오독립선언서에서보는이들이, 듣는 이들이 피를 끓게 하는 《궐기하라! 독립군!……육탄혈전함으로써독립을완성할것이다.》 이구호를제일먼저내놓고웨친사람이서일이다. 조선반도(한반도)를 망라한 겨레사회에서 가장 이르다는 무오독립선언서에 깃든 서일장군의 뜻을 헤아리고도 남음이 있겠다. 이 선언서를 《중광단선언》(重光團宣言)이라고도하고《무오독립선언》(戊午獨立宣言)이라고도   부른다. 대종교와 중광단의 발기와 위력으로 발표한 《무오독립선언서》는일본침략자들에대한공개적인선전(宣战)이아닐수없다.


 5


  서일은 하나의 거창한 일을 해냈다는 생각에 가슴이 뿌듯했다. 혼자만이 그런것이 아니였다. 서명자 모두의 기분이 그러했다.  

   중광단에서는 이민족(異民族)의 전제와 압박에서 해방되여 자주독립과 평등의 바탕위에서 공화정체(共和政體)에 의한 민주의 자립을 선언했다.이것은 명백한 시대적인 요청이였다. 복벽적 민족주의가  아직도성행하는 때에 이같은 주의주장이 나온것은 하나의 대담한 돌파로서 개혁이였고 혁명이였으니 진보가 아닐수 없다. 이 선언서의 력사적인 의의와 가치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번의 선언은 대종교가 중심이 되여 만주, 로령과 나아가서는 미주지역의 독립운동세력까지 포함하여 거족적인 차원에서 전개되였다. 선언문은그 방략에서 볼 때 종래 대일민간외교로써 동양평화를 실현하려했던 라철조교의 주장과는 달리 민족종교의 바탕위에서 항일민족의식을 고취하면서결단코 살신성인(殺身成仁)으로 조국의 광복과 민족의 자주독립을 쟁취하고야말겠다는 굳은 결심이 도도히 맥박치고있는것이다.  

   여기는 항일독립운동의 책원지다. 무오독립선언이 비록 대종교간부가 중심이 된 중광단의 선언이기는하지만 이는 분명 조선민족전체의 의지를 표현한 대일항쟁선언인 것이다. 그러니 어찌 거창하지 않겠는가?...

   총본사에서는 소를 잡고 찰떡도 쳐서 서명자들을 호궤(犒饋)하였다. 그야말로 용이치 않은 모임이건만 종당에는 리별을 고하고 각자 제 위치로 돌아가야 했다.

   이번 참석자중 년로자로 첫손을 꼽을 사람은 리범윤이였다. 큰 키골에 몸이 여전히 메마른 편인 그가 올해 나이 62세니 환갑이 지난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기력이 있고 정력도 흐트러짐이 없이 포만한 상태여서 좋았다. 그는 지금 명월구에서 자기처럼 지난날 의병을 지낸 진학신(秦學新), 최우익(崔宇翼) 등과 손잡고 동산재기를 준비하고있는 중이라 한다.

   어언 10년 세월이 흘러갔다. 서일은 28살을 먹던 해에 로씨야에 건너가 《대동공보사》의 유진률(兪鎭律)과 함께 하선마구(哈什媽溝)에 자리잡은리범윤을 방문하던 일을 잊을수 없다. 600명의 의병진을 바탕으로 최재형과 함께 사포대(私砲隊)가 사용하던 무기를 가지고 대일전을 전개하고있었던 리범윤은 그때 유진률의 소개로 서생티나는 서일을 알게 되여 어느덧 의중지인(意中之人)이 된 것이다.  

   리범윤은 만나자마자서일을 얼싸 안아주기까지 해서 모두들 두사람은 어느때부터 저렇게 자별한 사이로 되였을가며 놀랬다. 리범윤은 10년전에서일이 로씨야 연해주에 건너가 한고향 사람인 최재형의 집에 머무르면서 자기와 류린석, 홍범도, 안중근, 황병길 등 여러 지사들을 하나하나 찾아보고는 항일무장은 모래알같이 제가끔 흩어질것이 아니라 의례 하나로 통합해야 함은 물론 강적과 싸워 이기자면 련합작전을 해야한다고 선전해서 깨우치게 한 일을 말해 모인 사람 모두에게 나라와  백성을 근심해온 서일의 애국충정과 조국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일찍부터 발분(發奮)한 일단락을보여주었다.

   이번 모임에 이목을 크게 끈 다른 또 한 인물이 있었으니 그는 리범윤에 비해 나이가 33살이나 적은 김좌진이였다. 17세때 벌써 대한제국무관학교를 졸업한 그는 소문과 같이 그야말로 체구가 장사다운 거인이였다. 서일의 이것저것 관심에 김좌진은지금 잠시는 대한광복회의 삼달양행이 자리잡고있는 봉청가까이의 봉황성에 있다면서 돌아가서는 자기도 곧 무장단을 하나 세워볼 생각이라 속심을 털어놓았다.

   《두분 다 아마 초면이겠죠?》

남만의신흥학교의 교관 리세영이 리장녕과 같이 지나다가 서일과김좌진을보고 다가왔다. 리장녕역시 한말의 무관으로서 경술국치(庚戌國恥)후에 만주로 건너와 지금은 신흥학교에서 교관으로 있었다.

   서일은 자기보다 10여세 우인 리세영에주의를돌리였다. 그는 청양사람으로서 일명 유흠(維欽) 또는 천민(天民)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얼굴이 갸름하고 눈섶은 짙은데다 남달리 두끝이 아래로 쳐진 까만 팔자수염을 매짜게 자래워 마치 사나운 삵괭이같이 날파람있어 보인다. 그는 23년전 홍주에서 기의하였다가 리승우(李勝宇)의 간계로 패했고 민종식(閔宗植)과 함께 기의하여 참모장이 되여 싸우다가 또다시 곱잡아 패하고는 붙잡히우기까지하여 한동안 류형살이를 했다. 그러다가 거기서 풀려나와서는 독립단의군부(獨立團義軍府) 충천, 전라, 경상 3도의 사령관을 력임했고 6년후에는 함경, 평안, 황해의 독립단의용부 총사령으로 있다가 만주로 망명한 것이다. 그런 리세영이 지금 동만에 와서 서일과 뜨거운 이야기를 나눈다.


6


   드디여 활자로 인쇄된 무오독립선언서는 조선 내지와 로씨야, 만주, 미국 등지에 널리 배포됨과 동시에 조선총독부는 물론 서울시에 있는 각국 령사관과 일본정부에까지 전달되였다.

 

   이천만 동포야 일어나거라

   일어나서 총을 메고 칼을 잡아라

   잃었던 내 조국과 너의 자유를

   원쑤의 손에서 피로 찾아라...

 

   이것은 이번 서명집회기간에 창작된 《봉기가》였는데 마치도 불찌가 거센 바람을 탄 듯이 널리 퍼지면서 점점의 불꽃을 지펴놓기 시작했다. 거퍼이틀이 넘지 않아 중광단을 찾아오는 사람이 련이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해의 겨울은 조심스럽게 서서히 다가오고있었다. 이때의 서일은 총본사를 떠나 왕청 덕원리의 집에 와 있었는데 석현에 사는 한족지주 장송린이 문득 나타나 계화와 서일을 찾았다.  이때는 서일이 화룡의 총본사를 떠나 내내 왕청 덕원리의 집에 와 있었다.

   장송린은 서일의 지기라 기쁘기가 그지없다. 이말저말 인사말 끝에 장송린은 히죽이 웃으면서 품속에서 갖고 온 신문지 한 장을 꺼내였다.

  《보게나. 여기에 자네들에 관한 소식이 실렸네.》

   서일이 받아서 보니 그것은 근일자 《신보(申報)》였다. 신보는 중국에서 창간된지 오랜 신문인데(1872년에 상해에서 창간되였음) 거기에 대한독립선언이 길림성 왕청에서 만주, 로령, 미국에 있는 조선인 유지(有志)  39명의 명의로 만방에 알리니 이는 항일독립운동이 서막을 여는것이라는 보도가 대서특필로 실려있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서일은 낯빛이 확 밝아지면서 련신 되뇌이였다. 장송린이 그 소식을 알려주어 고맙기도 하거니와 더욱히는 중국에서 재빨리 자국의 4억 7천만 국민에게 이 일을 널리 홍보(弘報) 해주고있음에 감사했다.

   《당신들은 과연 잘하우다. 그래서 축하를 하러 온거지우. 쪽발이 일본놈이 어디 조선민족 하나에만 적이되는가유. 온 동양의 적으로서 우리 중국인민에게두 적이 되지유……이때를 맞아 당신이나서서 이같이 무장대오를 기르면서 대결하리라 공포하여 만방에 알리니 과연 대단한 일이요! 참으로잘하는 일이우다!》  

   장송린은 거듭 칭찬하면서 미래를 축복했거니와 력사적으로 중국과 조선은 강을 사이한 이웃이니 사실상 순치(脣齒)의 관계였음을 언급하면서 돈5천원을 내놓아 중광단에서 경비로 쓰도록했다.

   이건과연꿈밖의일이였다. 아닌게아니라 눈물이 나도록 지극히 고마운 일이라 서일은 감격에 목이 메이였다. 그는 그의 성의를 중국인민의 후더운 성원으로 여기고 고맙게 받는다고 했다.





독립만세소리



1

 

중국의 각 신문들은 1918년 11월에 4년여간 피비린내를 풍겨오던 제1차세계대전이 4천수백만의 목숨과 3천7백억의 전비(戰費)를 소모한 끝에드디여 독일과 오지리의 패배로 끝났다는 소식을 일제히 보도했다. 미국대통령 윌슨이 강화의 기본조건으로 14개조의 원칙을 발표하였는데 그 내용에 각국민족의 운명은 각자가 처결할것이라는 민족자결주의가 강조되여 세계에는 새기운이 몰아치게 되였다.

  무오독립선언은 세계의 대세를 오래도록 관망하여 온 서일이 독립운동의 서막을 열기 위해 적시에 취한 기발한 행동으로서 윌슨이 강조한 민족자결주의와도 들어맞는것이여서 그 영향이 기필코 만주를 벗어나 조선 국내의 유지와 일본에 있는 류학생들에게도 미치여 본을 보여줄 것이다.

   이런때, 1919년 새해가 밝아오는 때 서일은 1919년 1월 13일자 신보에서 《조선리태왕붕어(朝鮮李太王崩御)》라는 표제아래실린 놀라운두가지기사를 접했다.


  도꾜 소식: 조선 이태왕이 별안간 심각한 뇌일혈을 일으키는 바람에 이왕의 세자 은과 나시모또노미야 마사꼬 녀왕이 원래  25일에 거행하려던 혼례를 무기한 연기하기로했다.

  도꾜 소식: 조선 이태왕전하는 오늘 오후 6시에 붕어했다. 일본  궁내성에서는 이태왕장례를 국장으로 거행하기로 결정했다.  (이 전보문은 그 내용이 명확하지 않음) 일본천황은 이미 조문을 보냈다.

       

   리태왕이 붕어를 하셨다니 웬 말인가며 놀래지 않은 사람이 없다. 머리속에서 잊혀가고있었던 인물이였건만 정작 이런 소식에 접하고 보니 슬픔과한과 의혹이 착잡하게 엉겨붙으면서 진정키 어려웠다.

  광무황제는 1월 22일 3시에 비명에 붕어하였고 궁내의 관속은 벌써 외부에 소식을 루설하였건만 총독부는 이를 숨기고 각 신문에다 호외로 어환(御患)이 위급하다고 전하게 했다. 그날부터 23일 정오까지 일본정부와 총독부간에는 수십회에 달하는 전보가 오갔다. 그러나 조선인 상인들은 벌써눈치를 채고 국장준비를 위해 베(麻布)를 모아다 팔라는 전보가 빈번했다.  일본경찰은 그 전보들을 전부 압수했다. 리태왕을 시살한 흔적을 숨기기위해 영친왕의 혼례를 지내고나서 붕어를 알리려는 독계(毒計)였던거다.

  하지만 인심은 격앙하고 항설이 비등하여 더는 엄페할 수 없게 되자 23일에 이르러 《今日上午三時에 뇌일혈로 졸연 붕어하셨다》라고 발표했다.그러나 불을 종이에 살 수 없듯이 그 진상은 끝내 폭로되고야말았다. 일제는 적신(賊臣) 리상학(李相鶴)을 시켜 수라에 독약을 넣어 진상하였던것이다. 두 눈은 빨갛게 되였고 온 몸에는 붉은 반점이 돋고 살이 들떴다. 한시간도 못되여 독이 온 몸에 퍼진것이다.

  《내가 무엇을 먹었건대 이렇듯 고통되느냐?》

  리태왕은 숨을 거두며 말했다. 가까이에서 시중들던 궁녀둘까지 폭사하였다. 그들이 진상을 목격했으니 증거를 없애자는 수작이였다.


2

 

  삼천리강산에는 의운(疑雲)이 널리 퍼지면서 원통한 공기가 감돌았다. 각처의 애국지사들 가운데서 이 기회를 리용하여 대의를 거사하자는 의견이나와 비밀리에 론의하기 시작했다. 조선민족(한민족)으로 놓고 보면 1919년은 그야말로 범상치 않은 한해였다.

이에앞서서일이주도한,  1918년 11월 항일운동가 39명의 명의로 발표한 무오독립선언은 이미 전 민족 반일독립운동의 불길을 지피였었다. 이 무오독립선언에 힘입어 미국의조선인들은파리강화회의에서조선독립문제를해결해보려는념원에서그해(1918년) 11월 중순에 미국 쌘프랜시스코에서 전미조선인독립청원 집회를 가지고 파리에 파견할 조선인대표를 선정하는 한편 이 운동을 위한 의연금모집활동을 진행하였다. 이 소식이 일본 고베의 해당 신문들에 실리고 로령 연해주땅에 전해졌다. 이 소식은 연해주의 조선인 반일지사들을 통해 다시 이곳 연변땅에 알려졌다. 이따라 연변에서도 독립운동의연금 모집위원회가 나오고 선정한 민족대표를 연해주에 보냈다.

2월 8일에 일본 도꾜 류학생들이 《독립선언》을 발표했다. 지난해 미국 대통령 윌슨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는 일본 도꾜에 류학하는 1천여명동포학생들을 크게 자극했는바 그들은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자유를 만회하려고 고심초려(苦心焦慮)하였던 것이다.  

  국자가의반일지사들은고종황제(1919년 1월 운명)의 인산, 즉 국장(國葬)을 계기로 요배식(遙拜式)을 가지고 독립운동에 헌신할것을 선동하기로 했다. 2월 18일과 20일, 국자가의 김영학, 구춘선 등 33명 반일지사들은 비밀회의를 열고 연해주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는 날 연변에서도 운동을 벌리며 반일독립시위를 간도일본총령사관이 도사리고 있는 룡정촌에서 가지기로 결정하였다. 반일을 고려하여 김영학, 류례균, 박동원, 리성근, 고동환 등으로 결사의 각오를 가진《광복단》을조직하고혈서서명을하였다.

   한편명동중학, 광성중학, 정동중학을 비롯한 각 사립학교와 도립학교학생들은 자발적으로 강연회를 가진다, 학생대표를 선거한다, 반일선전활동을 가진다 하면서 여러 학교 간에 련계를 달았다. 2월 16일, 명동중학 학생 류익현이 간도학생대표로 연해주 니꼬리스크에 파견되고 룡정의 영신학교에《기독교동지청년회》가조직되였다.

   연변의독립운동은한창열기를올리며활발히진척되여갔다. 바로 이럴 즈음인 1919년 3월 1일 정오, 서울 파고다공원에서 전민적인 3·1운동이 일어나고 3월 7일 밤에 서울의 독립선언서가 연변에 전해졌다. 룡정촌, 국자가, 명동 등지의 각 사랍학교 학생들은 10일부터 동맹휴학을 가지고 연변의 반일집회를 촉구하였다. 연변의 반일지사들은 3월 9일 저녁에 긴급회의를 가지고 연해주와 호흡을 같이 하기로 했던 계획을 포기하고 3월 13일 룡정에서 먼저《독립선언발표축하회》를열기로결정짓고새독립선언포고문작성에착수하였다. 이 소식이 각지에 전달되자 달라자 명동학교의 학생들은 개산툰의 정동학교와 련계를 맺고 320여 명의 "충혈대"를 조직하였다. 국자가 도립중학교에서는 자위단을 무었다.



3


3월 10일, 룡정주재 일본총령사 스즈끼와 연길도윤(道尹)은 뒤늦게야 이 소식을 입수하고 기겁해 났다.  12일 연길도윤공서에서는 대회조직자들을 불러 운동금지를 요구하다가 거절을 당하게 되자 그날로 수십 명의 순경을 룡정촌에 급파하였다. 룡정일본총령사는 국자가 주둔 륙군 제2혼성려 보병 제10퇀 퇀장 맹부덕에게 반일독립시위 탄압을 강요했다. 그래도 소용없었다.


  —국자가의 군중들이 반동군경의 저지를 물리치며 부르하통하의 목교를 건너 룡정촌으로 향해온다.

  —평강벌의 학생들과 남녀로소들이 반동군경의 탄압을 박차고 룡정교외에 다달았다.

  —달라자 명동학교에 모였던 덕신사와 지신자 등지의 군중들이 명동학교 학생들을 선두로 하고 수십 리 길을 달려왔다.

  —정동학교의 학생들이 지방군중들과 함께 산을 넘고 령너머 저 앞에 나타났다

.

   그다음은군경, 순경들과의 일장충돌이다. 군중대오는 룡정 상부국순경들과 국자가에서 파견한 병사들에게 막혀 꿰고 지나지 못한다.

   허나무슨대수랴, 시간이 흐름에 따라 5000여 명 군중대오가 동산기슭에 모여 든다. 7000~8000명 군중대오는 대회장으로 휩쓸어든다. 놈들은 땀벌창이 되여 맴돌이친다. 맹부덕은 군중들을 막아내지 못한 채 부하들을 끌고 회장경계에 나선다.

   정오가가까워온다. 회장은 점점 인산인해를 이룬다. 룡정촌의 조선인은 물론 부근 백리 안팎의 달라자, 개산툰, 투도구 등지의 학생들과 남녀로소가 모이다나니 상부국 동산기슭엔 어느덧 2만여 명의 군중이 모이였다. 그들속에는 320명 학생《충혈대》와국자가도립중학교재학생과졸업생들을중심으로조직된 1000여 명의《자위단》 단원들이들어있다. 대오에는 일제 영사관소속 간도보통학교의 200여 명 남녀학생들도 섞이였다. 그들은 학교당국의 엄한 저애에도 불구하고 문을 박차고 나와 철조망담장을 짓부셨는데 일본인교장은《10년교육이 수포로 돌아갔다.》고애탄해마지않았다.

   그날대회소집은천주교교회당정오종소리를계기로시작되기로약속되였다. 이 소식에 접한 맹부덕과 상부국 국장 장은적은 교회당 일체 출입을 엄금하라고 교회에 알리였다. 헌데 정오가 좀 지나자 대회시작을 알리는 교회당의 종소리가 대회참가자들의 마음마음을 흥분시키며《땡, 땡》울리였다.

이게웬일인가, 중국 조선민족투쟁사의 한 기원으로 되는 력사의 종소리가 나어린 두 소년에 의해 울리었음을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그날의소년이고 3·13 목격자이며 원 연변대학 전임 부교장이었던 림민호선생은 후에 이렇게 회억하였다.


  나는그해에 15살밖에 안되는 소년이였다. 우리 집은 바로 룡정촌 천주교교회당 울안에 있었고 아버지는 그 교회에서 심부름을 하였다. 이날 아침 나는 일찍 일어나 아침밥을 바삐 먹은후 동네의 다른 한 동무와 함께 교회당 문지기의 눈을 피해가며 교회당 종루로 올라가 숨어있었다. 거의 정오가 될 때 우리는 국자가, 투도구 방면으로부터 룡정을 향해오는 대중대렬을 구경하며 대회장의 정경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대회장은인산인해를이루었지만대회는좀처럼열리지않았다. 나는 같이 구경하던 친구와 함께 종루의 종을 번갈아가면서 힘껏 쳤다. 종소리는 천공과 주위에 련속 울려 퍼졌다……우리 둘은 계속 종을 울렸던것이다……그때 종을 울린것은 우리 둘이였는데 우리는 누구의 지시를 받은적도 없었다. 그저 대회의 선포를 독촉하기 위한 것이였다.


   우연이라할가, 그 누구의 지시도 없이 오직 홍안소년의 호기심과 갈망으로부터 울린 력사의 종소리는 수천수만 대회참가자들의 부푼 정열을 안정시키고 연변 각지에서 모여든 우리 겨레들을 본세기 10년대 겨레투쟁사에서 가장 뜻깊은 반일집회 개막석에로 이끌었다.



4


   종루의종소리가울리자웅성거리던군중대오는물뿌린듯조용했다. 대회조직자들이 연단에 나타나자 예수교 신도이고 반일지사이며 대회 회장인 김영학이 대회를 사회하였다. 그는 오늘 대회는《조선독립선언축하회》라고지적하고나서《조선독립선언서포고문》을낭독하였다.


   아, 우리 동포들도 오늘이 있도다. 아, 우리 민족 역시 독립을 선언할 오늘이 있도다. 정안(正眼)하고 세계를 바라보니 인도주의적 평화도 오늘이 있도다. 생각하니 4천년 신성장엄한 력사 역시 오늘이 있도다…


   김영학이감격에넘친《포고문》낭독을마치고《공약3장》을발표하자독립만세소리가천지를진동했다.

   이어만세소리속에서류례균, 배형시, 황지영(여) 세 대표가 연단에 올라 일제의 만행을 단죄하며 격앙된 어조로 독립을 부르짖었다. 대회참가자들은 희비에 싸여 흐느끼고 환호하면서 태극기를 휘둘렀다.

   이무렵룡정촌안의조선인가게들에서는종소리를신호로문앞에태극기를내걸고철시를시작하였다. 1000여 명 군중들이 집을 뛰쳐나왔다. 그들은 저마다 손에 태극기를 들고《조선독립만세!》를목청껏불렀다.

   그렇게도부르고싶었던만세소리였다. 그네들의 얼굴마다엔 희열이 넘치였다. 이에 당황한 장은적은 순경들을 내몰아 가게들마다 꽂혀있는 태극기를 뽑게 하고 희열에 젖은 시가지의 남녀로소를 억지로 상부지밖으로 구축하였다.

   대회가끝나자대회참가자들은 320명 충혈대를 선두로 내세우고 충혈대 기발과《인도, 정의》라는프랑가드를추켜들고성세호대한시위행진에나섰다. 시위군중과 군경들, 일본 경찰들 사이엔 일대 충돌이 벌어지고 선후 17명 (19명이라고도 한다) 적들의 총칼아래 쓰러졌다.

   3월 13일 오후 대회 해산 후 조직자들은 구춘선, 강봉우 등 5명 대표를 국자가에 파견하여 연길도윤공서에 엄정한 항의를 제기하고 3월 17일에 제창병원 마당에서 3000~4000명의 군중이 참가한 14의사의 장례식을 성대히 가지였다. 오후 1시에 출빈행렬은《조선독립수난자》라고쓴만장을앞세우고상여를모시고룡정촌동남쪽 4리가량 떨어진 합성리동산묘지로 서서히 향하였다.

오후 3시에 장례식이 끝나자 열사들 묘지 앞에는 나무로 정성껏 만든 묘패가 세워지고 그앞에《충렬사제공지묘》(忠烈士諸公之墓)라고 새긴 비석이 세워졌다. 14열사로는 박상진, 정시익, 공덕흡, 김태균, 김승록, 최익선, 리유주, 김흥식, 박문호, 리요섭, 장학관, 현봉률, 현상지, 차정룡 등이다. 그후 3·13에서 중상 입은 투사들 중 김병영, 채창헌, 김종묵 등 3명이 또 희생되다보니 룡정 3·13운동에서 희생된 열사는 도합 17명이나 된다.

이는필자리광인이지난세기 1990년 중국 우리 글 문학평론지 《문학과 예술》에연재한글가운데의한편인 3·13 관련 글에서 밝힌 내용들이다.


5


   서일은 조선에서 일어난 3.1만세시위의 《공약삼장》을 다시보고는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결코 배타적감정으로 일주하지 말라, 그렇게 될수 있을가? 시위운동의 성격을 비폭력적인 것으로 규정해놓고는 조선민족의 독립의지를 내외에천명한다, 순진선량한 맘을 그래 누가 알아주는가? 그런다고 독립이 되는건가? 고작 그것만을 바라고 만세시위를 벌리다니?....평화적 수단으로 해결이 안되면?....시위는 피비린 진압을 당하고 있다. 만국회장을 붉게 물들였던  리준의 피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쳤던가? 그것을 벌써 잊었단말인가?》

   전혀 찬동이 되지 않았다. 목적이야 꼭같이 독립을 바라는거지만  결책자들의 나약과 비현실적인 기대에 결이 나면서 마음을 진정키 어려웠다. 대가를 피로 치르지 않고 독립이 된 나라가 없다, 일제의 통치가 부드러워지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굴욕이고 운동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것이서일의일관하고도견결한주장이였다. 육탄 혈전을 준비하는 서일한테는 비폭력적으로 하자는 그들의 주장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마침, 훈춘에 있는 황병길이 오래간만에 찾아왔다.  

  《서선생님, 여기서는 어찌하렵니까? 예수교에서 만세시위를 하고있는데 대종교가 잠자코있어서야 되겠습니까. 우리도 들고일어납시다. 왕청과 훈춘이 합심해서말입니다.》

  《왜 잊었단말이요? 대종교야 이미 지난해에 들고일어나지 않았는가. 그리했는데 어떻게 더 들고일어나란말이요. 우리 대종교는 행동을 이미 명백히 규명한바니 그들모양으로는 안할것이요.》

   서일은 이같이 말하고나서 만세시위로 동포들을 발동하여 투지를 앙양시킬 필요는 있겠으니 그 여세를 빌어 조속히 항일대오를 조직하고 그들을교육해 차츰 무장을 갖춘 독립군으로 길러내는 것이 중요하다고했다.

   황병길은 훈춘에서 항일무장이 조직되면 긴밀히 합작하자고 제의했다.

   서일은 황병길의 제의를 반갑게 접수했다. 한편 황병길은 훈춘으로 돌아가자 다년간 생사를 같이해 온 동지들과 토론하여 3.1독립선언축하민중대회를 3월 20일 오전에 열기로 하고는 황병길이 총지휘가 되였고 연통라자(煙筒砬子), 남별리(南別里), 황거우(荒溝), 둥거우(東溝) 등지의 여러 동지들은 훈춘과 북일중학교, 광동학교, 영생학교를 비롯한 여러 학교의 학생과 그곳 마을의 동포군들을 동원시킬 책임을 각각 맡겼는데 동원할 수는5000여명이였다.

   지정한 그날 그시간이 돌아오자 수천 군중이 훈춘시가에 모여 황병길의 지휘하에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시가행진을 단행하고 무사히 해산했다. 이를 방해하려던 일본령사관원들의 책동은 허사가 되고말았다. 적들은 지방의 중국관리와 토민을 금전으로 매수하여 황병길을 체포암살하려했다. 그러나 훈춘지방의 재류동포들이 일심동체가 되여 그를 엄호했다.

   황병길은 이같이 적의 삼엄한 감시와 추적을 받으면서도 왕청에 와서 서일과 약속한대로 훈춘지방에다 독립무장대오를 건설하기 위해 혼신의 정열을 몰부으면서 서두르기 시작했다.

룡정 3·13 독립시위와 더불어 독립만세 소리는 화룡현과 연길현, 왕청현, 훈춘현 각지에서 맹렬히 터져 올랐다. 불완전한 통계에 의하면 남만 등 지구를 제외한 연변지구에서 1919년 3월 13일부터 5월 1일까지 도합 30여 개 곳에서 반일집회와 시위가 53차 열리고 8만여 명의 조선인들이 동원되였다.

1919년 온 삼천리강산에서 일어난 3·1운동과 연변 룡정을 중심으로 한 3·1운동의 계속, 왕청현에서도 대종교 교도들을 중심으로  시위를 벌리며 독립만세를 불렀지만 대규모운동으로는 번져지지 않았다. 필자가 지난세기 80년대초 연변대학 조문학부 재학시절 왕청현 왕청진에 가서 리만섭 등 3명 로인—력사의 견증자들을 방문할 때 그들은 왕청 3·1운동에서 덕원리 중학부의 중학생들을 중심으로 각지 사립학교 학생들과 많은 대종교인들이 만세운동에 떨쳐 나섰는데 덕원리 중학부의 중학생들은 일제히 칼을 차고 보무당당히 나섰다고 회고하였다.

   이에앞서서일장군이무력항쟁을결단할때결단하고나설때라철대종사의유언대로제2세 교주로 등극한 무원종사 김교헌이 서일한테 대종교 교통을 넘기려고 하였다. 서일장군은 제2세 교주의 간곡한 권유를 5년 간 보류키로 하고 무장투쟁준비에 심신을 쏟아부었다. 서일은 시위나 만세소리로써는,적수공권으로써는 일제놈들을 이 땅에서 몰아낼 수 없다면서 무력항쟁을 착착 내밀고있었다.





연해주첫무기구입




서일은즉각석현의 한족지주(漢族地主) 장송린이 준 의연금으로 무기를 구입해 들이는 일에나섰다. 콩알을 주으려면 콩밭에 가던지 아니면 콩털이를 하는 마당에 가야 할것이다. 그래도 다른 어디보다도 제1차세계대전을 치룬 로씨야에서 무기를 구입해오는 것이 선차적일 것이니 서둘러야했다. 로씨야, 특히는 원동지방에서 아직도 백파(白派)인 꼴챠크의 잔여가 남아서 적파(赤派)와 대결하고 있었으며 특히는 제1차 세계대전에 출병하였던 체코병들이 무장을 놓은 상황이라 수를 대여 구멍만 제대로 뚫는다면 그자들의 무장을 사들일수 있다고보아졌다. 서일은 현재 중광단에서 주축을이루는 계화, 리홍래, 채오(蔡圭五), 량현, 최익항 등이 모인 자리에서 이 문제를 내놓았다.

   모두들 생각이 서일과 일치했다. 일본군이 아직 철거하지 않은 원동지구로 누구를 파견하느냐 하는 문제가 나오자 계화가 거기로는 자기가 자주다녀 길도 아니  념려될 것 없다면서 자진해 나섰다. 서일이 그럼 그렇게 하기로 하고 그보고 데리고 갈 사람을 자기절로 고르라했다. 그랬더니 계화는자기와 생사를 같이해와서 아주 익숙하거니와 로씨야어를 구사할줄 알고 신체가 단단한 의병 김동평(金東平)과 요즘 만주로 방금 건너온 함북 경원출신의 날파람있는 청년 김학섭(金學燮)까지 해서 셋이 떠났다.  

   예견이 없은건 아니지만 장차 무기를 계속 사들일 생각을 하니 군비가 막대하게 지출될것이 뻔한 사실이였다. 군비의 절대부분을 대종교도가 맡고있으며 약방도 꾸리고있지만 그만으로는 힘겨운것이였다. 서일은 정사흥(鄭士興), 강철구(姜鐵久), 김덕현(金德玄) 등을 불러 조선에 나가 군자금을모집할과업을주었다. 독실한 대종교도인 그들은 이미 여러번 군자금모집에 나서서 성과를 적잖게 거두었던차다.

   서일은 그들을 보내고나서 이번에는 허중권(許中權)을 불러 함북도에 가서 남양, 종성, 회령, 무산 등 두만강연안의 변경구에 사리틀고있는 적의병력배치 정황을 탐지해오도록 지시했다. 허중권 역시 처음부터 자진하여 정탐을 나선 사람인데 세심하고 담대하거니와 총명해서 여직 한번도 실수한적이 없이 임무를 완성했다.

   중광단 본부의 소재지인 덕원리 마을을 비롯하여 주위의 20여리 이내의 경비를 리교성과 허활이 각각 무장대원 20명씩 데리고 책임지고있는데 5일전에 룡정의간도일본총령사관에서 파견한 성이 고씨인 중년의 첩자가 마을에 발을 들여놓다가 경비대원들께 잡힌 것을 내놓고는 아직까지는 별 문제가 없었다. 서일은 잡힌 그를 고문하거나 죽이지 않고 내심하게 교육함으로써 되려 적의 동태를 료해하고는 점심까지 먹여서 돌려보냈다.  

   연해주로 무장구입을 갔던 계화일행이 떠난 지 12일만에 총 98자루와 탄알 8상자(1만발)를 사서 말잔등에 싣고 돌아왔다.

   《우리는 사흘만에야 연해주에 들어설수 있었소. 그러구는 꼬박 엿새동안 이부락 저부락 돌아다니면서 총을 사들인거요. 지금 연해주의 경비를 일본군이 맡고있는데 치안이 극도로 혼란스러워 집집이 거의 총을 한두자루씩 휴대하는 처지라서 돈을 주니 여벌은 파는데....아무튼 운이 좋았지.》

   계화는 총을 쉽게 사게 된 리유를 간단히 말하면서 장차도 총은 아무튼 로씨야에서 사들일수 있을 것 같다고했다. 연해주로 가면서 계획에 없었던말을 두필이나 사온데 대해서 서일은 아무튼 잘한일이라 했다. 모두들 성공했다며, 수고했다며 무등 기뻐했다.




림시정부 수립소식                  

 

  

 3월달이 다가는 어느날 조성환이 왕청에 왔다. 그간 로씨야를 돌아보고 오는 길이였다. 그는 서일을 만나자 씨베리아의 동태를 알려주였다.

   《그곳 소식이 이리로도 전해왔으리라 믿네.》

   《예, 대략적인 것은 우리도 알고있습니다만....씨베리아에서는 2월달에 벌써 전로한족회를 대한국민의회로 개칭하고 윤해와 고창일을 대표로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했다면요. 요즘은 서둘러 림시정부를 세우고있다는데 어떻게 되여가고있는지 궁금합니다. 그걸 자세히 알려주십시오.》

   림시정부수립에 관해서 서일은 자신이 정치일군도 아니거니와 정력 또한 따르지 못해 직접 참여하고푼 생각은 없지만 지극히 관심하게 되는 일이라 자연히 신경을 모으고있었다.

   조성환역시 서일은 독립혁명을 함에 보다 실제적이고 적실한 행동으로는 무력항쟁이 우선이라 여기면서 이에 력점을 두고 혼신의 정력을 몰붓고있으면서 림시정부를 수립하는 일같은데는 직접적인 참여를 피하려한다는 것을 아는것이다. 서일에 대해 료해가 제일깊은 사람은 그와 계화였다.

   《그쪽에서는 3월 17일에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나서 요즘은 림시정부 각료의 명단과 5개 항목의 결의안을 발표한것이요. 내가 그걸 갖고왔는데 자 보게나.》

   조성환이 과연 그것들을 갖고와서 내놓는것이였다. 서일이 받아서 훑어보니 그쪽에서 세운 림시정부의 각료라는 것이 학부총장과 범무총장은 결정되지 않고 대통령에 손병희, 부통령에 박영효, 국무총리에 리승만, 탁지총장에 윤현진, 군무총장에 리동휘, 내무총장에 안창호, 산업총장에 남형우,참모총장에 류동열, 강화대사에 김규식이였다.

    5개의 결의안은 이러했다.

   1. 대한국민의회는  조국독립의  달성을 기약하며 세계민족 자결주의에 기인하여  한국민족의 정당한 자주독립을 주장함.

    2. 일.한합병조약은 일본의  강압적 수단으로 성립한 것이고 우리 민족의 의사가 아니므로 그 존속을 부인하고 일본의 통치 철페를 주장함.

    3.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강화회의에 대표를 파송하여 독립운동과 정부건설의  승인을 요구하며 국제연맹에 참가를 주장함.

    4. 한국독립운동의 실정을 세계에 선전하며  정부건설의 사실을 각국 정부에 통지하여 우리의 주권을 주장함.

    5. 이상의 목적이 인도, 정의의 공정한 판결을 받지 못하면 일본에 대하여 혈전(血戰)포고를 주장함.  

     

    서일이 들고있던 종이장을 놓자 조성환이마음에드는가고물었다.

   《적당히 할 말은 다한 것 같습니다만 마지막항의 이것말입니다....그네들이 공정한 판결을 내려줄수 있을까요? 일본에 대하여서는 아무튼 혈전포고를 해놓고 봐야하는겁니다. 조선생, 아니그렇습니까?》

   서일은 자신의 주장에 변함이 없음을 피력했다.

   《옳은말이요. 나역시 그 생각이요.》

   조성환이 머리를 끄덕였다.

   《만세시위는 그 여파가 국내외에 널리 미쳐서 구경은 적잖은 이들을 각성시키고있는겁니다. 한데 이제야 독립선언이나 만세시위만으로는 조선의독립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요 또 이루어질 수 있는 일도 아님을 깨닫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하긴 이쯤한것도 요행이라 생각됩니다. 조급해 할일이아닙니다. 우리가 극악한 왜의 세력을 조선반도에서 몰아내고 자주독립을 이룩하자면 보다 원대한 계획과 조직적인 힘을 길러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서서일은그 누가 승인하건말건간에 우리에게는 우리들의 정부가 있어야한다, 조선생께서 림시정부수립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주실것을 바란다, 우리들 주장의 대변자가 되여달라고부탁하였다. 그러잖아도 조성환은 림시정부수립에 꼭 참여할 작정이였다.

※ 위 내용에 대한 오류와 사용자가 이를 신뢰하여 취한 조치에 대해 조선족정모는 모든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 SOSK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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