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편 신민회 회원

제3편 신민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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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편신민회회원





분통터지는소식에





서일은 1902년 봄에 경성함일사범학교를 졸업하고1911년 봄까지 10년 간 고향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 시절 1905년 11월 17일, 일본에 의해 이른바 《을사 보호 조약》이강압적으로체결되면서나라는한개독립국가로서의당당한지위를잃고이른바일본의보호국이되고말았다.


이분통터지는소식이전해지자온나라는울음의바다로되였다. 을사보호 조약을 맺는데 앞장섰던 내각 대신 리완용, 박제순,  리지용,  리근택, 권중현 등 을사 5적은 죽여도 씨원치 않을 놈들이였다. 서일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듯 지대한 분노를 느꼈다. 그는 매일이다시피 같은 학교 선생으로 친구인 박기호 등과 더불어 나라의 비운을 통탄하였다.


그러던 1907년 새해 벽두에 친구 박기호가 서울의 《대한매일신보》를들고서일을찾았다. 신문에는 고종황제가 이른바 1905년 《을사보호조약》은짐이아는바가아니라고부인한 6항목의 친서수교가 실려 있었다.(21)


《그러면그렇겠지!》


1905년 《을사보호조약》 체결이후늘고종의무능함을통탄하며고종을욕하던서일로서는고종황제를다시리해하는신선한뉴스였다.


신문에실린 6항목의 친서수교를 통하여 서일과 박기호는 사실 고종황제도 일본의 침략야심을 오래전부터 간파했지만 국력이 약해서 감히 맞서지 못하고 나중에 망국의 비운을 겪어야만 했다는 것을 알았고 기울어진 나라를 다시 일쿼 보려는 마음을 읽어내고 기뻐서 어쩔줄 몰라했다.


얼마후신문에는보다충격적인소식이실리였다. 전라남도 보성군 출신인 홍암 라철이 1905년 을사오적 암살계획을 내밀며 3월 25일을 거사일로 잡고 내밀다가 실패하고 말았다는 뉴스였다. 그때까지 서일은 라철이 누구인지 거의 모르고 있었으나 현실세계의 라철은 보통 사람이 아니였다.


라철은 1863년 12월 2일 전라남도 보성군에서 이 세상에 왕림한 후 본명을 인영(寅永), 호를 홍암(弘岩)이라고 불렀다. 29세 때 장원급제하여 승정원(承政院) 가주서와 승문원(承文院) 권지부정자 벼슬을 하다가 33세 때 징세서장이 되였다. 그러나 날로 본격화 되여가는 일제놈들의 침략행위에 열을 받아 관직이고 뭐고 팽개치고 1904년에 유신회(维新会)라는 비밀단체를 무어 구국운동을 펼친다.


을사조약의정식체결을앞두고라철은 1905년 6월에 동지들인 오기호, 리기, 홍필주 등과 함께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가려고 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도꾜에 물앉았다. 이 기간에 일본의 총리대신이요, 추밀원장이요, 귀족원이요, 중의원이요 선택하여 동양평화를 위해 조선에 선린의 교의를 펼치라는 의견서를 띄웠으나 강물에 돌을 던진 격이다. 그는 일본 궁성 앞에서 3일간 단식투쟁을 벌리다가 이또 히로부미가 조선과 그 무슨 새 협약을 체결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나라 매국노 제거가 급하다며 인차 귀국길에 오른다. 1906년에 일본의 반성을 촉구하고저 다시 일본행에 오르나 역시 뜻을 이루지 못한다. 그러다가 추진한 것이 을사오적 처단이다.


라철이 1907년 1월부터 을사오적 암살계획 추진을 위해 자신회(自新会)라는 비밀단체를 조직하니 그 구성원이 재빨리 200여 명에 이른다. 그러나 3월 25일을 거사일로 잡았으나 실패하고 만다. 서일은 이 실패의 뉴스를 "대한 매일신보"에서 보고 맹랑하여 신문을 내동맹이친다. 그러다가 4월 2일자 서울의 한 친일신문에서 3월 25일 주모자인 라철이 동지들과 함께 을사오적인 박제순, 리지용 등 암살을 꾀하다가 또 실패하고 오기호, 김동식과 함께 평리원(平理院) 에자수했다는뉴스를보고진정할수없다. 라철은 재거사를 추진하다가 동지들이 륙속 체포되는데서 동지들과 함께 자진하여 자수하고 만 것이였다.



1907년 서울행




서일은그이상보고만있을수없었다. 그는 박기호 등과 밀담하다가 어느날 함흥에 계시는 친부가 건강이 좋지 않아 가 보아야겠다며 교장선생께 청가를 올리고는 부랴부랴 서울행에 올랐다. 서일의 서울행은 서울 대한매일신보사의 신채호를 만나기 위함이였다. 신채호와 언녕부터 사귀며 친구로 지내던 서일은 신문을 무기로 싸우고있는 신채호를 만나야 직성이 풀릴것 같았다.


신채호(1880~1936)로 말하면 충남 대덕군 출신으로서 18세 되던 해에 천원군 목천에 있는 대학자이며 고관인 신기선 대감댁을 드나들면서 신구학문의 책속에 빠지다가  19세 때 서울에 올라가 3년제 대학인 나라의 최고학부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이해 늦가을 신채호는 애국문화운동을 지도하는 나라의 첫 애국단체인 독립협회에 가담했다가 얼마후 (겨울) 일제의 검거선풍에 휘말려 들어 리승만,  리승훈, 안창호, 박은식, 리동휘, 리갑, 안병찬 등과 함께 체포되여 첫 옥살이를 하게 된다. 다행히 나이 어리고 신기선 대감이 힘써준 덕에 대검거선풍에서 쉬이 풀려날 수 있었으나 신채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였다.


1905년 2월, 신채호는 성균관박사로 되였다는 통보를 받았으나 봉건관리란 벼슬에 연연할수 없다며 결연히 상투를 잘라 버리고 개화의 물결속에 뛰어 들었다. 이해 여름에는  《황성신문》사사장이며애국계몽운동가인장지연(张志渊)의청을받아들여황성신문의론설기자로활약한다.  이해 11월에 황성신문이 일제에 의해 폐간되자 대한 매일신보의 총무 량기탁의 권유로《대한매일신보》의논설위원(후에는 주필)으로 되여 독자들의 심금을 울리는 문장들을 써내고있었다.  1905년 11월 17일 이른바 《을사보호조약》이체결된후주필장지연이설음으로끝맺지못한《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声大哭) 사설을 계속 쓴 것도 그러하고, 1905년 12월 28일 《대한매일신보》 사설《재시일유방성대곡》 (再是日又放声大哭)도그러했다.


《대한매일신보》에근무하던시절에신채호는벌써언론인, 력사연구가, 애국계몽사상가, 전기작가로 활약하면서 국권회복과 민족자강에 토대를 둔 민족주의 사상을 확립한 사람이였다.


신채호는 1905년 이른바《을사보호조약》으로외교권을박탈당한뒤를이어 1907년에 또《정미7조약》이강압체결되여군※※※저해산당하자비분에치를떨였다.  그는 안창호 등에 호응하여 비밀결사단체—《신민회》발기자로나섰다. 신민회가 조직된 후에는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 신민회의 대변인으로 일하였다. 이에 앞서 그는 자기를 찾아 서울로 온 서일을 만나게 되였다.


   신채호는느닷없이자기앞에나타난서일이반가웠지만라철이존경할만한분이라며 3·25거사와그후체포된이들의형편을알고싶다는서일이더더욱반가웠다. 둘은나라의시국을두고많고많은이야기를주고받으며마음이하나로물결쳤다. 얘기가 라철에 이르러서는 겨레의 일대 위인이라며 라철의 석방에 힘을 모아 보자고 결의하였다.


서일과신채호는그길로함께리회영을찾았다. 리회영(1867~1932)은 호가 우당(友堂)이고 독립운동가이고 1910년에 대종교에 입교한 사람이다. 이해 12월에는 중국 남만의 류하현 삼원포로 망명했다가 신흥강습소를 꾸린다. 이는 훗날의 일이지만 신채호와는 뜻이 맞아 돌아가는 동지였다. 마침 리회영이 서울에 있지 않아 그들은 만나지 못하고 그의 동생리시영(1869~1953, 독립운동가이며 정치가)을 만났다. 리시영은 자기보다 10살도 더 아래인 두 젊은이가 라철을 비롯한 5적암살사건 관련자들에 관심을 돌리는 그 소행이 고마워 같이 평리원을 시탐해 보았고 두 젊은이에게 고종황제를 움직이는 최선의 노력을 다해 보겠다고 약속하였다. 과연 누구의 노력인지는 모르나 라철은 10년 형으로 지방유배를 당하고는 그해 12월 7일 고종의 특사로 석방되는 행운을 지니였다.


서울행(22)에서서일은친구신채호와함께륙군련성학교조교로뛰는김규식이를만났다. 신채호가 서일과 김규식 사이에서 함북 경원이다, 대바르고 용감한 청년이다 소개하면서 세 사람은 인차 한맘으로 이어졌다. 김규식도 5적암살 활동의 실패를 아쉬워하고 체포된 사람들을 걱정하였다. 서울에서 세 젊은이들은 기울어져가는 나라를 건지려는 우국충정으로 가슴을 불태웠다.



귀향길서본대한매일신보



서일은서울을떠나귀향길에올랐다. 연도에 함흥에 들러 부모님을 뵙고 다시 배편으로 경성에 들리였다. 경성은 서일로 말하면 잊을 수 없는 고장이다. 이곳 경성함일사범학교는 서일의 모교가아니던가. 그런데 현실은 경성함일사범학교의교장이자함경북도근대화운동의선구자인리운협교장선생이갑작스레돌아가시고교원들도많이바뀌어학교는생기로끓던기운을많이잃어가고있었다.


《이제손을잡고뭔가해낼기회는올것이니아무말도말고눌러있어. 교육구국도 바람직한 일이거든.》


서일은모교의친구들과뒤미처이렇게말했다. 그리곤 친구들을 통해서 라철을 무척 숭배하고 있다는 경성의 젊은 친구 최익항을 만났다. 그들은 라철선생과 그의 애국심을 가지고 맘을 주고 받다가 최익항이 갖고 온 1907년 4월 15일자 대한매일신보 뉴스를 계속 화제로 떠올렸다. 6월 15일부터 개최된다는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대한 뉴스였다.


만국평화회의란 1907년 6월, 네덜란드 남부 해변도시 헤이그에서 열린, 26개 국 대표가 참석한  제2차 만국평화회의를 가리킨다. 서일과 현천묵, 최익항은 만국평화회의에 이 나라 대표가 참석해 이른바 을사보호조약 불평등을 세상만방에 호소하면 얼마나 좋을까고 개탄하면서 일본에 외교권을 박탈당한 현실을 두고 분통을 터트렸다. 그때까지도 그들은 고종황제가 로씨야 황제에게 보내는 친서와 만국평화회의에 보내는 특사 신임장을 원 평리원 검사 리준한테 주어 서울을 떠난 것을 모르고있었다.


서일은 1905년 일본에 의한 을사 보호 조약의 강압적 체결은 1907년 새해 벽두 《대한매일신보》를통해고종황제가아는바가아니라는것을이미알고고종황제를리해하고있었다. 그 시절 고종황제는 또 영국인 베텔이 경영하는 국내 매일신보에 일본에 의한 이른바 을사보호조약의 무효를 선언하고 미국인 할버트를 황제의 밀사로 워싱톤에 파견하여 미국정부에 을사보호조약의 무효를 호소하였으며 서울 주재공사 알렌까지 청하여 미국의 협조를 요구케 하였다. 뒤늦게야 서일은 고종황제의 이런 노력들이 서방 렬강들의 친일정책으로 예기의 효과를 보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분노로 온 몸을 떨었다.


고종황제가만국평화회의에특사를파견한줄을모르고나라대표를파견해세상만방에조선의현실을알려야한다고본서일등의생각과마음으로우러나온행동은나라를지극히사랑하는애국자가아니고서는가질수없는소행이다. 고종황제는 비밀리에 원 의정부 참찬 리상설을 정사로, 원 평리원 검사 리준을 부사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보내기로 결정하고 행동에 옮기였다. 그 행동이 바로 서울에 있는 리준이 1907년 4월 22일 서울을 떠나 부산에서 바다길로 울라지보스또크에 도착한 것이 아니던가. 그때 북간도 룡정에서 서전의숙을 꾸리고 조선 이주민 후대들을 위한 교육사업에 전념하던 리상설은 동생 리상익을 통해 리준의 급보—고종황제의 어명을 전해받고 서전서숙 숙장을 사임하고 울라지보스또크으로 가서 리준을 만나고 리준과 함께 로씨야 수도 뻬제르부르그에서 원 로씨야 주재 조선공사 리범진과 그의 아들이고 공사관 참사관으로 일하는 리위종을 만났다. 뒤이어 리상설, 리준,  리위종 셋이 네덜란드로 떠난다. 리위종은 프랑스어를 잘했기에 동행하게 되였다. 비록 이들 셋의 네덜란드행도 여러 가지 원인으로 예기의 목적을 이루지는 못했으나 조선(한국)은 살아있고 조선사람(한국사람)들은 죽지 않았다는 것을 세상만방에 널리는 효과를 가져 왔다.


   귀향길경원에서친구들과최익항을만난(23) 서일은시국을논하다가우린절대덤비지말고기회를기다려야한다고힘주어말하였다. 돌아가는 시세를 잘 헤아리다가 때가 되면 같이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 서일이의 소신이였다. 그 소신에는 새로 사귄 친구 최익항더러 들으라는 의미가 깃들어 있엇다.


친구들은서일의기회를기다리라, 때가 되면 같이 행동한다는 말뜻을 너무도 잘 리해하고있었다. 함일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그들은 교편을 잡은 학교는 달라도 평소 늘 만나 뜻을 같이 하였으며 1905년 일본의 이른바 《을사보호조약》으로비분에떨다가두주먹을불끈쥐였으며네덜란드만국평화회의로하여희망을가져보기도하였다.  



신민회와손을잡고



1907년 7월의 어느날 서일은 뜻밖에 서울에서 찾아온 신채호를 맞이하게 되였다. 서일이 학교의 교원들에게 서울 대한매일신보의 주필 신채호라고 소개하자 선생들은 신문사 기자로서 지방 취재에 나서지 않으면 력사연구 자료수집으로 지방답사에 나선 줄로 알았다. (24)


   그러나서울의신채호가함경북도경성에나타난것은그무슨취재를위해서도아니고그무슨력사답사를위해서도아니였다. 남들에겐 극비밀이였으니 이 극비밀이란 서일을 신민회에 가담시키는 것이였다. 신민회란 무얼까? 이를 알자면 항일운동가 안창호한테로 돌아가야 한다.


1905년 11월 17일, 일본에 의한 이른바 《을사보호조약》의강압적체결소식은잠시미국땅에가일하는안창호를분노케하였다. 그는 두 주먹을 불끈 틀어쥐다가 1907년 봄에 서둘러 안해와 태여나 돌이 된 첫아들 필립을 미국에 남긴 채 급급히 귀국길에 올랐다. 그는 귀국한 후 전국을 돌며 민족사상과 애국정신을 고취하기도 하고 장지연, 리동휘, 리동녕,리갑, 리시영, 리승훈, 김구, 신채호 등을 만나며 나라의 앞일을 걱정하다가 이해 4월에 동지들과함께신민회를조직하였다.


신민회는사회각계각층인사 20여명을  망라하여 서울에서 조직된 비빌결사단체이다. 리동녕, 안창호, 량기탁 등을 지도부로 한 신민회는 국권회북과 공화정체의 국민국가수립을 궁극적 목표로 삼았다. 해외에 독립군기지의 건설로 군사력 양성을 기도한 것도 신민부 발기자들이 바라는 목표였다. 그러나 겉으로는 문화적, 경제적 실력양성운동을 내세우며 일제놈들의 주의를 따돌리였다.


   신채호는안창호와손을잡고신민회에가입하였으며중심적인회원으로정력적인활동을벌리였다. 신채호가 《대한매일신보》 의주필로, 신민회의 대변인으로 뛴 것은 그때부터의 일이다.


어느날대한매일신보사장베델이신채호를찾더니미국에유학갈생각이없는가고물였다. 신채호가  1905년 11월 《을사보호조약》으로나라가외교권을잃고또 1907년 《정미 7조약》으로군※※※저해산당했는데이판국에외국유학이다뭔가고대답했다. 베델은 신채호가 사양하는 줄 알고 《세계적인 학자가 되도록》 주선해주겠다고했다. 이에 신채호는 우선 감사부터 드린 뒤 《우리 이 겨레와 나라속에 몸담고 있는 나로서는 운명을 같이 해야 하는 관계》라면서굳이사절하였다.


신채호는언론인, 력사연구가, 애국계몽운동가, 전기작가로, 신민회의 중견으로 활동하면서도 경원에서 묵묵히 힘을 모으고 있는 자기의 견실한 친구 서일을 잊을 수가 없였다. 그래서 만사불구하고 함경북도 경원으로 달려왔던 것이다.


서일은고향땅에서신채호와밤을새우면서많고많은이야기를주고받았다. 고종황제의 퇴위소식과 서울에서 발생한 일들이 그러하고 서울시민의 폭동을 다룬 자기의 7월 21일자 첫 기사가 그러했다. 그중에서도 화제의 중심은 고종황제의 퇴위였다.


먼저고종황제가로씨야황제에게드리는친서내용을보기로하자.



짐은오늘의경우가더욱험란하여호소할길이없는지라폐하께서는본국이무고히화를당하고있는정상을참작해서짐의사절로하여금본회의에서설명할수있도록협력해주시고만국의공정한여론을일으킬수있다면매우감사하겠노라. (25)


                                             -


고종황제의친서를받은로씨야황제는후한례의로사절을접대하고만국평화회의에참석한로씨야대표넬리도프백작에게부탁하는글을써주였다.


1907년 6월 24일 고종황제가 파견한 3명의 밀사는 네덜란드 헤이그에 도착하여 인차 나름의 활동을 벌리였다.  6월 29일에는 로씨야 대표이고 만국평화회의 의장인 넬리도프를 찾아 로씨야황제가 보낸 친서를 전하고  정식대표로 만국평화회의에 참석시켜 줄 것을 요구하였다. 넬리도프가 정식대표로 인정하는  권한이 네덜란드 정부에 있다며 책임을 회피하자 이번에는 네델란드 정부 외무부를 찾아 교섭을 벌리였다. 네덜란드 외무부는 을사조약이 효력을 내는 한 조선은 외교자주권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대표자격을 거부하여 나섰다. 세 밀사는 그들이  네덜란드 정부를 찾아가기 전에 이미 일본 측에서 네덜란드 정부와 내통했다는 것을 알리가 만무했다.


그래도물러설수가없였다. 그들은 로씨야 대표 넬리도프와 미국 대표부를 다시 찾아 고종황제의 신임장을 내놓으면서 이른바 을사보호조약의 페지와 조선의 자주독립은 정의적이니 정의의 편에 서줄 것을 강력히 요구했으나 역시 효과를 보지 못하였다. 영국, 프랑스 대표들을 개별 방문해도 그 상이 장상이였다.


리상설과이들세밀사는헤이그에서의 10여일 간 평화회의 의장을 찾는다, 네덜란드 외무부를 찾는다, 미국 대표부를 찾는다,  도처에서 연설을 한다, 국제기자협회 연설장에서 성명을 발표한다, 각국 대표단을 부지런히 찾아 다닌다 하면서 불철주야로 뛰고뛰였으나, 각국 대표들로부터 많은 동정을 받기는 하였지만 궁극적으로 만국평화회의 정식대표 자격만은 얻지 못하였다. 이에 리준은 울분을 참지 못해 병이 났고 머나먼 이역땅에서 분사했다.


어디그뿐인가. 일본대표한테서 조선의 세 밀사 파견과 활동을 알게 된 일본정부는 조선 통감 이토히로부미를 통해 고종을 문책하기에 이르고 고종황제는 모른다고 회피해 버린다. 일이 여기까지 이르자 조선 통감부는 리완용을 시켜 몇 차례 이른바 내각회의를 소집하고 고종을 핍박하여 양위하도록 한다. (26)  


신문과신채호를통해네덜란드만국평화회의와세밀사의소식을  알게된서일은일본제국주의자들을이땅에서몰아내지않으면안된다면서신채호의신민회가입요구를흔쾌히받아들이였다. 그리곤 자기의 생명과 자산을 다하여 신민회를 후원하기로 맹세하였다. 그러는 서일이 신채호한테는 그지없이 고맙고 존경스러웠다.  이는 더없이 소중한 마음 주고받음이 아닐 수 없다.



시국에  눈을박다



신채호가경원에다녀간후만국평화회의에파견된밀사리준이헤이그에서분사했다는소식이온반도땅을흔들었다. 경원땅도 례외가 아니다. 나라의 세 밀사는 아무리 뛰여도 정식대표 취득길이 막히였는데 고종황제까지《짐이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발뼘하니헤이그에있는세밀사들에게는사형선고나다름없다.


헤이그일본대표마저지랄발광이다. 이자는 세 밀사가 고종황제의 밀서를 위조하였다고 떠들며 밀사들의 자유행동을 제한하겠다, 국제법에 의해 체포하겠다고 위협하니 앞길이 캄캄하다. 성격이 강직한 리준은 분함으로 한 가슴 들먹이며 연일 식음을 전폐하다가 7월 14일 저녁 순국의 길을 떠난다.


이소식에접한경성학교는리준을의렬투사라고칭송하면서수업마저중단하고리준투사를애도하였다.


그런데 8월 9일부《대한매일신보》(제515호)에는 사람들을 더욱 분노케 하는 기사가 실리였다.



융희원년 8월 9일, 평리원에서 리상설씨 등에 대한 안건을 심사 조률하여 본부로 보고했는데 리상설씨는 처교(处绞)하고 리준, 리위종은 종범으로 종신형에 처한다.



조선총독부에의한기사게재이다. 여기서 말한 륭희(隆熙)는 리씨조선의제27대 임금이고 마지막 황제인 순종의 년호를 말한다. 조선 통감 이토히로부미와 매국대신들은 1907년 7월 20일 오전 8시에 일본군과 헌병들의 삼험한 경계하에 중화전에서 간단한 즉위식을 갖고 황태자를 등극하게 하니 이 황태자가 순종이요, 고종황제는 태상황이라 고종황제는 더 뻗칠 힘이 없어 7월 19일 마침내 퇴위조칙을 발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상기 대한매일신보 기사대로 리상설씨는 처교하고 리준 등은 종신형에 처한다니 리위종은  그런대로 로씨야로 돌아갈 수 있다만 리상설은 사랑하는 조국에 돌아갈 수조차 없게 되였다. 서일은 다시 두 주먹을 불끈 쥐면서 시국의 흐름을 면밀히 주시하기 시작하였다.


고종황제의퇴위소식이전해지자서울의모든점포와상인들은거리에나섰으며서울시민들은너도나도손에닥치는대로몽둥이와쇠붙이들을잡고시위에떨쳐나섰다. 김규식의 선동하에 보병 제1련대 제3대의 100여명 군인들도 시위에 합류하였다. 시위는 폭동으로 번져갔다.



서울성안과성밖의조선사람들은사기가충천하고피눈물로땅을적시면서  일본놈을만나기만하면죽이고저하였다.



1907년 7월 21일부 대한매일신보 기사다. 경원에서 이 신문을 읽은 서일은 덩달아 흥분되여 자기도 그 서울 시위속에, 서울 폭동속에 휘말리는 기분이였다. 서울 시위와 폭동이 일제놈들의 탄압과 회유로 실패의 운명에로 갈아앉았을 때는 너무도 맹랑하여 가슴을 쥐어 뜯었다.


고종황제가퇴위하고순종이즉위하자일본은어리숙한순종황제를허수아비로만들고매국노리완용등을내세워7월 24일 밤 이토히로부미의 관저에서 새 조약《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체결하니일본통감이내정을직접간섭하고각부에는일본인차관을두어차관통치를하며조선군대를완전히해산시켜버렸다. 그로부터 나라 군대가 해산되고 경찰권과 사법권이 통감부로 넘어가니 조선 왕조는 일조에 허수아비정권이 되고 말았다.


《망할자식들! 권리를 다 빼앗는 판이로구나! 나라의 립법권, 내정권, 관리임명권, 파면권, 일본인관리임명권에 외국인고용의 금지권이라....통감이 다 틀어쥐였으니 이제 우리한테 남은게 무엇이냐?》


   《남은건 죽는 권리밖에 없다!》


   서일도 박기호도 분통이 터지였다. 히로부미란 이놈이 종래 고문 또는 참여관으로 있던 일본인들을 다 해임하고 그 관리들을 조선정부와 지방관청(도감영) 각 부의 차관으로 들여앉혔다니 더욱 그러하다.


《차관이란게뭐냐? 조선인장관의 다음자리라? 말은 좋다. 그게 다 형식이지. 형식이구말구. 실지로는 그놈들이 각 부의 권한을 다 쥐는거야.》


  《그렇구말구. 그러구는 신협약의 내용을 착착 집행하자는게지 뭐야.》


   서일의 말에 박기호가 맞장구를 치며 이또 히로부미가 차관정치를 창안한 목적을 까밝히였다.


  《종래 통감은 외교권을 틀어쥐고 시정에 대해서는 겨우 소극적인 충고권을 가지였을 뿐이였어. 그러나 이같이 함으로써 이제는 적극적으로 한국정부를 지도할 권한을 가진게 아닌가. 조선정부의 기능이 이제는 명실공히 유명무실한 존재로 되고말았다! 왜놈이 이 나라의 자주권을 더욱더 란폭하게 유린하게 되였구나!....그래 어느 개놈들이 나라를 이같이 팔아 먹느냐?》


   서일이 통분하여 웨치는 것을 보고 박기호가 이번 조약을 가(可)로써 찬성한 7적의 이름을 손가락을 꼽아가며 세였다.


  《원통하기만하다. 500년 대통을 이어온 조선이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지다니?! 》


서일은박기호랑같이다시땅을치며부르짖다가마음을진정하였다. 울부짖고만 있을 때가 아니다. 나라와 겨레를 구할 방도를 찾아야 한다. 서일은 신채호와의 경성만남, 신민회의 취지를 생각하다가 여기저기 들리는 의병소식에 귀를 기울리기 시작하였다.




의병소식에고무되다




한일신협약(정미7조약) 체결 후 해산을 달가워하지 않은 군인들이 폭동을 일으키오,  왜병들과 무기를 들고 싸우오, 군대해산에 불복해 의병으로 넘어가오 하는 신선한 소식들이 자주 들리였다. 그 가운데서도 서울에서 알게 된  김규식 등 군인들의 소식이 보다 고무적이다.


어지러운그시절, 김규식은 강화진위대부교들인 연기우(延基羽), 지홍윤(池弘允)와 하사 류명규(劉明奎) 등과 혈맹을 맺았다. (27) 그들은서로긴밀한련계하에폭동준비를다그쳐 8월 9일에 드디여 의거(義擧)하였다. 이날 강화도 도민들도 함께 일떠났다.


한데 폭동군인들이 무기고의 총과 탄약을 꺼내여 무장하려고 하니 일제가 이곳 진위대병사들을 장악통제하기 위하여 박아넣은 친일주구로서 소대장 부위로 있는 민완식과 참위 민영락이 무기탈취를 반대하여 나섰다. 이에 진위대병사들은 격분하여 잡아죽이려했다. 그러자 그자들은 그만 질겁하여 걸음아 날살려라 똥줄빠지게 서울로 내빼고말았다. 진위대군인들은 무기고에서 600여정의 무기를 꺼내여 자기를 무장하는 한편 그것으로 투쟁에 따라나선 강화도 도민들까지 무장시키였다.


   무장한 폭동군은 그 길로 순사주재소를 습격하여 순사를 처단한 다음 이어서 군청을 습격하여 친일주구이며 이곳 일진회의 두목인 군수 정경수를 처단하고 갑천(甲串)에서 왜병과 싸워 한개 중대를 격멸하였다.    


   강화에서도 진위대군인들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안 하세가와사령은 고무라에게 보병 1개 소대와 기관총 2문을 주어 이를 진압케하였다. 여러 사람의 강권에 못이겨 두령의 위치에 오른 김규식은 폭동군인들을 이끌고 강화도를 떠나 의병항쟁으로 넘어갔다.    


이같이신식교련을받고해산된군인들이혹은부대로혹은개인으로산지사방에서물밀듯이모이였다. 적잖은 이들이 무기를 휴대했다. 그래서 의병에도 이제는 신식무기가 있게 되였다. 하지만 인원에 비해 무기는 의연히 태반부족이여서 많은 사람이 화승총이나 칼을 들고 싸워야만했다.  


   2년전, 을사조약이 체결되여 온 국민이 비분강개하여 어수선하고 험악한 분위기에 쌓여있을 때 단양산중에서 때를 기다리던 운강(雲岡) 리강년(李康秊)이 의검(義劒)을 높이 들고 각지에서 의병을 규합하니 김상태(金尙台), 리만원(李萬源), 백남규(白南奎), 하한서(河漢瑞), 권용일(權用佾), 민순호(閔舜鎬) 등 39인의 의병장들이 그에 호응하여 용감히 항쟁하여 왔다.




시기는 기회를 주는 것이다.




   이러던 차 이번에는 원주진위대장 민긍호가 부하장병과 무기일체를 준비하여 갖고 리강년진에 합세함으로써 의병진은 더 강하게 되였다. 그들은 경상도, 강원도, 충청도일대에서 싸워 날이갈수록 살신보군(殺身報國)의 전적을 날리였다. 8월 13일 제천전투에서 일거에 적 500여명을 사살한 그들의 사기는 그야말로 충천하였다.


   판서 심상훈(沈相薰)으로부터 리강년의병진의 이같은 혁혁한 전공을 들은 고종황제는 그로 하여금 리강년을 도체찰사(都體察使)로 하여 종사(宗社)와 국토를 보전할 것을 간곡히 당부하는 밀칙(密勅)을 전달케하였다.


   양력 8월 19일에 내린 고종황제의 칙서는 이러했다.



 《슬프다. 나의 죄가 크고 허물이 많은지라 하늘의 도움을 받지 못하여 강악한 이웃나라가 넘보게되고 역신이 국권을 롱단하여 마침내 4천년 종사와 3천리강토가 하루아침에 오랑캐의 땅이 되려하니 나의 이 실날같은 목숨이야 아까울 것 없지만 오직 종사와 인민을 걱정하여 마음깊이 애통하는 바이다. 여기 리강년으로 하여금 도체찰사에 임하고 7로에 권송하는 바이니 량가의 재자로서 각기 의병을 일으키게 하고 소모관에 임하여 스스로 인부를 새기어 종사토록 할지어다. 만약 명령에 복종치 않는 자가 있으면 관찰 수령(守令)으로 먼저 목을 베여 파출(罷出)하고 처분하여 강토를 보전하고 사직을 수호함에 목숨을 다하여라. 이 글을 비밀히 보내니 나의 뜻을 다 알아서 행사하라.       광무11년 7월 11일 어새》    


             


   심판서가 칙서를 전달하니 리강년은 감격하여 막료장병들을 대동하고 민긍호 부대 등 40여진이 운집한 진중에서 칙서를 랑독하였다. 장졸들은 감격하여 흐느껴 울며 일사보국(一死報國)할 것을 맹세하였다. 그리고는 리강년의병장을 전국도창의대장(全國都倡義大將)으로 추대하였다.


   그들은 과연 멋지게 싸웠다. 전적(戰績)은 이러했다.


 8월 28일, 청풍황강전투에서 600여명의 왜적을 목베고 많은 전리품 로획.


   9월 10일, 문경갈평전투에서 왜적 수백명을 전멸.


   10월 22일, 제천군 신림누치산록에서 대부대의 왜적이 습격해 온다는 정보를 탐지하고 기선을 제하여 아군을 좌우산정에 매복케하였다가 적을 협곡 깊숙히 유도한 다음 일거에 맹공격을 가하여 이를 전멸.  


   11월 2일, 죽령에서 60여명의 적을 도륙냄.


   11월 6일, 거듭 죽령에서 적 600여명을 섬멸.


   11월 10일, 거듭 죽령에서 적 80여명을 도륙냄.


   11월 28일, 영춘에서 적 100여명을 목베니 사기와 군의 성망이 크게 떨쳐 각지의 국민이 다투어 의병진영에 모여 들었다.




경원군수와종성군수




이럴때이런소식들에무딘환갑이다된경원군수리동호가군내에서굴지의지식인으로손꼽히는서일을찾아왔다. (28) 그때서일은조선군대가해산하여답답하기만하다는리동호군수와이렇게이야기했다.



—"논어"에 이르기를  나라를 다스림에는 "충족한 병력이 있어야 한다"고 했고 "상서"에서는 정사 여덟가지 중의 하나가 "군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시경"을 보면 "주왕 혁연은 대노하니 군대를 정돈하여 나가 싸웠다"고 했습니다. 손자병법에 헌원황제나 상탕왕이나 주무왕이나 다 무력으로서 사회를 구원했다고 썼습니다. 무엇을 말하자는 걸까요?...군수님, 생각해 보세요. 나라를 세우고 지킴에 무력이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그를 중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걸 강조한것이지요. 안 그렇습니까?


—사마벙이 "남을 함부로 죽이는 자 있거든 나는 그 자를 가히 죽일수 있네라"했습니다. 복수를 하라는 말로 해석이 되지요. 안 그렇습니까? 우리는 앉아서 그저 당하기만 할 수야 없지요. 안 그렇습니까? 원쑤 오랑캐를 토벌하지 않고 난적을 격멸하지 않으면 국가는 영원히 망해 버릴 것이요, 강토는 영원히 잃어 버리며 동포는 영원히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29)



서일이리동호군수와터놓은속셈이다. 이 대화에서 서일은 무장투쟁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바 경원에서 신채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시국을 주시하면서 각지 의병투쟁에서 얻은 결론을 토로하고 있다. 나라와 겨레를 구하는 길을 모색하다가 내린 서일의 결론, 이는 서일이 후에 가족을 데리고 두만강을 너머 왕청현 덕원리, 십리평에 진출하여 북로군정서 총재로 무장투쟁의 길을 걸은 배경이라 하겠다.


하지만무장투쟁의길은말하자곧현실로펼쳐지는길이아니였다. 이 길은 크나큰 담력과 재력과 힘을  안받침하면서 기회와 조건을 마련해야 하고 장기적인 투쟁을 수요로 하고 있었다.


국내의병투쟁소식에이어로씨야연해주에서도고무적인의병소식이전해졌다. 원 종성군수 김치보와 안중근에 대한 소식이다.


  1905년《을사보호조약》과함께리완용등이《을사오적》(乙巳五賊)으로 떠오르자 종성군수 김치보의 분노는 절정에 달하였다. 그는 군수고 뭐고 죄다 내동맹이 치고 결연히 로씨야 연해주로 가서 신한촌에 항일독립단체《한민회》를꾸리고회장으로활약하였다. 한민회지휘부는 김치보가 독립운동후원을 목적으로 꾸린《덕창약국》(德昌葯局)에 설치되고 김치보가 친히 한민회의 재무와 후근, 무기공급을 도맡았다.


   알고보면김치보는원적이평양이고 1860년 음력 9월 17일 태생으로 전해진다. 조선서는 김성준으로도 통하고 만주와 로씨야에서는 김감령으로도 불리웠다. 그의 경력으로 보면 김치보는 리조말기의 4품관으로서 선후로 평양군수와 종성군수로 지내기도 했다. 지난 90년대 초반에 필자 리광인이 훈춘시 춘화진에 가서 김치보의 가족을 찾았을 때 이 사실을 다시 확인하여 보았다. 그들 가족에서는 김치보의 종성군 군수 임명장을 1968년도까지 줄곧 정히 건사하였었는데 창호지(백지)에 씌여진 임명장은 길이가 600미리메터, 너비가 400미리메터였다고 한다. 임명장에는 구한말의 외부대신, 학부대신이였던 리완용의 도장(길이와 너비 각기 90미리메터)까지 찍히였단다.(30) 이런학부대신리완용이을사5적에서도 첫자리라니 분노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한민회는항일구국의기치를든철저한독립운동단체로서안중근, 우덕순, 조군선, 김성화, 탁공규 등이 주요회원으로 나섰다. 1909년 새해 첫날 그들 12명은 회장 김치보와 함께 연해주 연추(즉 노오끼엽스크)부근의 카리란 마을(김치보가족사에는 신한촌으로 되여있다)에 모이였다. 자연히 1908년 한 해 동안의 로고가 회고되고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토론은 나중에 결사대를 조직하고 군자금을 모으며 일제놈들과 계속 싸우자는 데로 모아졌다.


   일이이쯤번져지자그들은피로써서약하는혈맹—단지동맹를 뭇고 조막도끼로 왼손무명지의 손마디를 자르고 흐르는 피로 태극기에《대한독립》이란네글자를쓰고서명하기에이른다.


   김치보와안중근은뜻이맞는동지이자막연한지기였다. 그들은 나이 거의 20년 격차에도 불구하고 서로 어울려 돌아갔다. 어느덧 한민회에서 반일독립을 도모한 지도 옹근 2년, 김치보가 울라지보스또크에서 조선인학교를 꾸리며 단체의 후근일에 몸을 잠굴 때 안중근은 그를 도와 대업을 받들며 나라 침략의 원흉 이또 히로부미(이등박문)를 죽이려고 매일 육절포(권총)사격연습을 늦추지 않았다. 하도 이악스레 접어드니 술병을 공중에 던지고 쏘아도 백발백중, 사격에 숙달하여 작은 산새들도 쏘아 맞혔다는 것은 이런 연유였다.


   드디어기회가왔다. 1909년 10월 20일, 일본 추밀원 원장이고 조선 침략의 원흉인 이또 히로부미가 로씨야의 재정대신 꼬꼬브체브를 만나려고 10월 하순에 할빈에 간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김치보와 그의 동지들인 안중근, 우덕순, 조도선, 김성화, 탁공규, 황병길 등이 신한촌 덕창약국에 모여 이또 히로부미를 죽여버릴 거사를 의논하였다. 이어 김치보를 총지도로 하는 이또 히로부미암살지휘부가 세워졌다. 하지만 이또 히로부미의 할빈행이 어느 길인가가 밝혀지지 않은데서 그들은 3개 소조로 나뉘여 할빈, 장춘, 심양쪽으로 가서 대기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또 히로부미가 어디에서 나타나면 어디에서 죽여버릴 판이였다.


   력사는안중근에게기회를내주였다. 이해(1909년) 10월 26일 오전, 이또 히로부미는 끝내 할빈역두에서 안중근의 권총에 맞아죽었다. 이 희소식이 전해지자 김치보는 누구보다도 더 기뻐하였다. 이날을 위해 김치보는 안중근 등과 더불어 얼마나 신고하였는지 모른다.


   여러신문과소문을통하여김치보와안중근의거사를알게된서일은너무도흥분되여어쩔줄몰랐다. 김치보, 안중근과 같은 반일지사들이 있는 한 나라는 희망이 있지 않는가. 서일은 선후로 현천묵, 박기호 등을 만나 안중근의 할빈거사를 주고받으면서《안중근은영웅이오. 우리도 안중근처럼 싸워 보자구!》하며두주먹을불끈쥐였다.

※ 위 내용에 대한 오류와 사용자가 이를 신뢰하여 취한 조치에 대해 조선족정모는 모든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 SOSK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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